지난해 11월 말 한국일보가 이충재 주필을 고문으로 위촉하면서 ‘이충재 칼럼’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한국일보 한 고참기자는 기자협회보에 이렇게 털어놨다. “그동안 밖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위에서 이충재 주필 칼럼을 불편해한다는 이야기가 돌곤 했어요.”
한국일보가 이번엔 ‘김희원 칼럼’ 중단을 요구했다. 한국일보 기자 74명은 8일 낸 연명 성명에서 “사장이 지난달 30일 김희원 논설위원에게 새로 만들 ‘뉴스스탠다드실’ 실장 인사 발령을 사전 통보했다고 한다. 인사가 나도 ‘김희원 칼럼’을 계속 쓰고 싶다는 본인 의사에 ‘스탠다드실 업무 관련 칼럼만 쓰라’고 답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회사는 지난해 퇴사 후 고문이 된 이충재 전 주필에게 다른 고문과는 달리 칼럼을 쓰지 못하게 했다”며 “‘김희원 칼럼’ 역시 주로 정치 분야를 다루며 정부와 국회 등 권력에 날 선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다. 실장 인사가 김 위원의 펜을 꺾으려는 시도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 2월에는 김 위원이 발제한 김건희 여사 관련 사설 <‘김 여사 의혹’ 왜곡이란 대통령실, 검찰이 판단케 해야>가 당일 오후 1시까지 지면계획에 포함돼 있다가 경영진에 의해 빠지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기자들 성명에 따르면 이성철 사장은 5일 노조와 면담에서 “김 위원에게 실장 자리를 제안한 것이며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는 이후 “김 위원을 실장으로 임명하고 ‘김희원 칼럼’을 계속 쓰게 하거나 다른 기자를 실장으로 발령하는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노조에 알려왔다.
기자들은 한국일보가 2017년 1월 미디어전략실을 신설하고 이희정 전 논설위원을 실장으로 발령내고 아무런 역할도 주지 않으며 3년6개월 만에 떠나보낸 사례를 지적하며 “아직 단행되지 않은 김 위원 인사에 많은 기자들이 우려와 분노, 좌절감부터 쏟아낸 것은 그때의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최고 선임 여성 기자 두 명이 몇 년 사이 비슷한 방식으로 기자 본래 업무가 아닌 직무를 맡게 되는 것은 여성 기자 배제라는 의구심을 부를 수밖에 없다”면서 “더구나 현재 뉴스룸국 부장 10명 중 여성 부장은 단 1명뿐이며 여성은 한 차례도 국장에 임명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기자들은 “여성인 기자들에게 지속돼온 공공연한 배제와 차별이 공고해지려 하는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면서 “기자 본연의 의무인 권력 비판에 충실한 기자가 존중받는 곳, 성별을 이유로 조직에서 열외되지 않는 곳,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곳, 그곳이 한국일보가 서야 할 자리라고 믿는다”고 했다.
한국일보를 대표하는 칼럼 중 하나인 ‘김희원 칼럼’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은 모기업인 동화그룹이 YTN 지분 인수에 뛰어든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승명호 회장이 YTN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일보가 중도 정론지의 정체성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온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는 지난 4월18일 발행한 노보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는 발제 단계에서부터 압박이 들어오고 우여곡절 끝에 출고가 되더라도 온라인 제목을 수정하라는 지시에 시달린다. 지면에 실리지 않거나 기사가 축소·굴절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기자들 사이에선 적어도 당분간은 현 정부와 각을 세우는 기획이나 기사를 쓰기 힘들어진 게 아니냐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