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기자에 더 많은 운동장을

[이슈 인사이드 | 젠더]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이혜미 한국일보 기자

“나는 내가 공 차는 것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어제 연습경기 이후 땀내 나는 상태로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동료들과 슈팅 연습을 좀 더 열심히 해야 하네 어쩌네 얘기하면서 알게 됐다. 어, 나 공 차는 거 좋아하네? 그냥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서 싫었던 것일 뿐. 12개 팀 여기자님들 다 다치지 마시고 무사히 끝냅시다. (김남영 중앙일보 풋살팀 주장 페이스북)”

요즘 소셜미디어에서 여성기자들이 초록빛 인조잔디 위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곧잘 눈에 띈다. 6일 열리는 제1회 한국기자협회 여성회원 풋살대회를 준비하는 이들이 올리는 훈련 사진들이다. 노트북이 든 큰 백팩을 멘 채 현장을 누비고, 방송 생중계 연결을 기다리며 카메라 앞에 서고, 기자회견을 받아 치느라 길바닥에 철퍼덕 앉던 동료들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땀 흘리며 운동장을 장악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활기가 샘솟는다.

지난 2월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한국일보에도 재빠르게 팀이 생겼다. 예전부터 풋살을 즐긴 최주연 주장이 뉴스룸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스카우트해 꾸렸다. 팀명은 ‘한골일보’. 3년차~10년차 선수 11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선수들은 퇴근 후에도 풋살장으로 향해 연습에 매진하고, 귀가 후에도 드리블 영상을 찍어 서로의 사기를 북돋운다.

“A 매체는 아침 보고까지 열외 되며 매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B 매체에는 체대 출신이 있답니다!”취재와 보고로 밥벌이하는 기자들답게, 시시때때로 경쟁팀의 정보가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다. 타사 선수의 귀여운 도발 메시지를 돌려 보며 전의를 불태우기도 하고, 집단지성을 발휘해 청량한 민트색 유니폼 디자인도 함께 했다. 각 부서에, 출입처에 외따로 존재했던 여성기자 사이에 전우애가 피어나고, 연대감이 살찐다.

‘이 좋은 걸 왜 우리는 이제 알았니?’ 선수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정인선 한겨레 기자는 동료들과 팀워크를 맞추는 연습 사진을 SNS에 올리며 ‘회사 생활의 새로운 낙’이라고 했다. “풋살을 하면서 경력직 기자들은 선후배를 자연스럽게 알고 어울리게 됐어요. 남자 동료들은 이런 커뮤니티가 주는 기회를 진작에 누려왔구나 싶었죠.”

‘기협의 시도가 반갑다’ ‘시대 흐름에 따른 마땅한 움직임이다’. 여성기자 풋살대회 개최에 호평이 넘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남성 기자 위주의 기협 축구대회는 1972년 처음 시작돼 지난해까지 49회째 열리고 있다는 걸 고려했을 때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간 여성기자들은 응원만 하는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는데, 전체 여성기자 비율이 겨우 30%를 넘어서면서 이 같은 성차별 관행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00년 전부터 이 땅에는 여성기자가 존재했거늘, 왜 이들을 위한 운동장은 여태 열리지 않았던 걸까.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재임 기간 내내 월요일 아침마다 여성기자만 초청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남성 중심 문화의 언론사들은 여성 채용을 꺼렸고, 극소수 여성기자는 연성 이슈만 취재할 수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금주법 해제 등 특종이 나오자 처음에는 무시하던 보수적인 언론사도 부랴부랴 여성기자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장이 열리자 선수가 생겨났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성장의 기회를 얻는다.

이번 풋살대회 운동장은, 여성기자에게 열리지 않았던 수많은 운동장 중 하나일 뿐. ‘한골일보’의 선전을 누구보다 응원하면서도, 대회에 참가한 12개 팀이 모두 맘껏 즐기면서 승리감에 젖길 바라본다. 우리들이 개척해야 할 운동장은 출입처에, 뉴스룸에, 지면과 큐시트 속에 아직도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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