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해지고 악랄해진 언론 길들이기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대일 굴욕외교로 뺨맞고 기자에게 눈 흘긴 격인가. 한일정상회담 이후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는커녕 일본 외교청서에서 독도 영유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정부가 기자에게 분풀이를 했다면 쪼잔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 해외 연수자로 뽑힌 KBS 기자가 ‘한일정상회담 일장기 오보’ 뒤 급작스레 취소된 과정이 석연찮다. 언론재단은 해외연수자 선발 규정에 없는 재심사를 진행해 입길에 올랐다. 특히 심사위원 5명 중 외부 위원 3명이 “규정이 없어 재심할 사안이 아니”라는 의견을 줬는데도, 재단 내부 임원들이 취소를 결정해 정부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강하게 받고 있다. KBS 기자는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일장기 보도 뒤 면접이 있었고, 당시엔 문제 삼지 않았던 사안을 되짚어 선발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재심 사유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 요청을 들었지만, 방통심의위는 아직 안건 회부조차 안했다. 결론도 나기 전에 서둘러 연수를 취소할 급박한 사정이 있었는지 납득이 안 된다. 재심을 앞둔 기자가 재단 간부한테 “괜한 수고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 재심은 어차피 요식행위였음이 드러났다. 언론재단은 연수자 취소에 누가 압력을 행사했는지 스스로 밝혀야 한다. 정책적 판단을 들먹였지만, 실제론 정치적 판단을 내린 재단의 구부러진 잣대를 개탄한다.


정권에 찍혀 보복받은 다른 사례는 또 있다. 대통령 관저 이전에 역술인 ‘천공’이 개입됐다는 의혹을 보도한 뉴스토마토는 대통령실 출입기자 교체를 신청한 지 10주가 넘었지만 “경호처에서 신원 조회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해 듣고 있다. 통상 3주면 끝나는 신원 조회 기간을 보면 천공 보도에 심기가 불편한 대통령실이 질질 끌고 있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대통령실은 보도 뒤 정보통신망법상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상태다. 시시비비는 법적 절차에 따라 가리면 될 일이지, 보도를 이유로 출입기자 변경을 해주지 않고 앙갚음하고 있는 행태는 쪼잔하기 그지없다. 대통령 비속어 논란 관련해 대통령 해외 순방 때 MBC 기자를 전용기 탑승 거부했던 그때 일이 떠오른다.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목에 가시 같은’ 보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 CIA가 국가안보실을 도청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는데도 “악의성이 없다”며 옹호하는데 바빠 국가안보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엔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술 더 떠 도청 보도를 마치 국가에 하등 이득 될 게 없는 문제제기로 치부해버린다. 도둑에게 집이 털렸는데, 도둑 탓을 한 언론을 혼내는 모양새다. 그리고 언론이 꼬투리 잡힐만한 보도를 하면 침소봉대해 마치 언론이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듯 몰아간다. 여세를 몰아 비판언론을 배제하려는 패턴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KBS 수신료 분리징수도 언론 길들이기 연장선에 있다. 합리적인 토론과 논쟁을 통하지 않고, 수신료 통합징수를 서민 주머니 털어가는 나쁜 언론 프레임으로 접근해 소모적 분란만 키우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하고, 비판 언론에 재갈을 채우려는 그 속뜻을 모르지 않는다. 국민을 두 쪽으로 나눠 이득을 보려는 정치적 셈법으론 어떤 갈등도 해결할 수 없다. KBS 기자 해외연수 취소도 이런 정치적 구도와 무관하다고 보지 않는다. 보도 실수를 수차례 사과했는데도, 보도 기자를 찍어내는 뒤끝 작렬 행태는 물불 안 가리는 조폭과 다름없다. 언론재단이 이 판에 들러리를 섰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언론재단이 있어야 할 곳은 권력 편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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