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공백 채워줄 종가의 문헌들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이소연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이소연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만약 예전처럼 민간의 곳간을 가혹하게 침탈해 소란스럽게 하는 자가 있다면, 경이 적발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1593년 3월17일, 선조가 도체찰사(都體察使·조선시대 전시 최고 군직)였던 서애 류성룡(1542~1607)에게 내린 유지(有旨)에 남긴 기록이다. 군사들은 식량이 없다는 이유로 전장에서 도망치고, 백성들은 곡식을 거둬간다는 이유로 원통함을 호소하던 상황…. 선조는 이 유지에서 “조정의 본의는 본래 이와 같지 않다”며 “근래 관원들이 이러한 조정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낱알 한 톨까지 가혹하게 거둬들여 여론이 들끓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곡식을 모으는 여러 도의 관원들을 이미 파직시켰다”고 전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고문헌이 처음으로 국역됐다. 문화재청과 성균관대 유학대학이 2018년부터 ‘중요기록유산 국역 사업’을 실시하면서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 7월부터 1607년까지 선조가 류성룡에게 내린 유지 76건과 명령서 1건 등 총 77건을 엮은 보물 ‘유성룡 종가 문적-유지’가 우리말로 옮겨진 것.
특히 이 유지는 ‘조선왕조실록’과 ‘선조실록’에 축약돼 언급되거나 누락됐던 조정의 대응전략이 상세히 담겨 임진왜란 역사의 공백을 채워줄 거라는 평가가 나온다.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은 “이 사료를 통해 임진왜란 동안 조정의 전술과 이에 따른 성패를 다시 분석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능한 왕으로 여겨졌던 선조에 대한 평면적인 평가를 뒤집는 인물사를 재구성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베일에 싸여 있는 역사’가 더 있다. 보물로 지정된 고문헌 상당수는 이 유지처럼 종가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학계 전문가 개인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데다 번역에 많은 품이 들어서다. 개인이 쉽사리 나설 수 없는 일이기에 문화재청이 나서야만 하는 이유다. 문화재청이 2018년부터 현재까지 이 사업을 통해 우리말로 옮긴 민간 소장 고문헌은 30종, 총 1075책 186만9374자에 이른다.


이 사업으로 완역된 보물 ‘함양박씨 정랑공파 문중 전적-저상일용(渚上日用)’ 속에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격변기 사회상이 드러난다. 저상일용은 1853년부터 1935년까지 함양박씨 집안의 4대에 걸쳐 쓴 기록물을 15책으로 엮은 것으로, 한 집안이 먹고 입고 사고판 기록이 빼곡하다. 가장 사적인 가정사 속에 당대 화폐단위와 물가의 변천은 물론 농촌생활사가 담긴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 유배 생활 중 청나라 학자의 편지글을 필사한 보물 ‘김정희 종가 유물-척독초본(尺牘鈔本)’이 국역되면서, 앞으로 추사와 청나라 학문 간 유사성을 비교 연구해볼 길도 열렸다. 김정희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金石學)의 대가로 알려졌지만 그간 그가 청나라 학자들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 하나의 국역본이 후학에게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개인이나 종가가 소장해왔던 고문헌들이 모두 국역되는 날, 역사는 새롭게 쓰여야 할 겁니다.” 6년 동안 국역 사업을 이끈 공정권 성균관대 유학대학 책임연구원이 남긴 말처럼, 역사의 공백을 채워줄 원천은 무궁무진하다. 역사의 원천이 되는 사료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멈춰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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