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없는 전환

[언론 다시보기]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어떤 정치공동체 내에서, 혹은 서로 다른 정치공동체 간에 아주 중대하고도 심각한 인권 위반의 유산이 내려온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정치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분야를 ‘전환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2차 대전의 사례로 본다면 독일과 유대인 공동체 간에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전환적 정의’를 이해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런 정의가 요구되는 이유인데, 바로 ‘중대하고도 심각한 인권 위반에 대한 치유’ 때문이란 점이다. 관련 연구자 모두가 동의하는 일치점이 있다면, 전환적 정의는 언제나 피해자들을 해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데 있다. 만약 집단 간 관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다시 세우는 일을 생략하거나 경시한다면 관계의 전환은 있을지언정 정의의 측면은 사라져 버린다.


이런 이유로 정의로운 전환을 원한다면 반드시 선행해야 할 조건이 있다. 우선 책임 있는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이 만족할만한 ‘사과’를 ‘명백하게’ 그리고 ‘지속해서’ 표명해야 한다. ‘사과’는 가해자들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가 있어야만 가해 집단과 피해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 설정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만약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관계의 개선을 먼저 원한다면, 그것은 그 피해자에게 자존감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해 집단이 하는 사과의 진정성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경우 개인적 처벌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그럴 수 없다면 피해를 본 당사자들에게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라고 부른다. 이런 응보적 정의까지 실현된다면,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기본적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해선 안 된다. 피해자에겐 그 중대한 인권 위반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상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가해 집단이 명백히 지속해서 사과하고 응보적 정의를 인정하고 실현했을 때, 갈등하는 집단 간에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관계 짓기가 가능해진다. 덧붙이자면 피해자 역시 대다수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붙잡고 있는 지독한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길 원하길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사과하면 용서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우리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의 가장 큰 문제는 ‘전환적 정의’에 필요한 일본 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과도, 법적 책임도 모두 면제했다는 데 있다. 우리 정부가 해법을 내고 난 이후, 일본 외무상은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강제동원은 없다. 이미 다 끝난 일이다”고 말했다. 그사이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는 “우린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나”라고 묻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언론은 피해자 입장은 거의 전달하지 않고 정부의 해법을 ‘대승적 결단’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에 필수적인 조건이 생략된 상태에서 ‘대승적’이란 말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기본 요건을 모두 무시했다’는 것 외에 어떻게 달리 해석될 수 있을까? 인권보다 국익이 더 ‘대승적’이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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