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병 시절 부산 사하구를 출입했던 기자는 늘 땟거리로 골머리를 앓았다. 아들 고생이 눈에 밟혔던 어머니가 어느 날은 ‘영화소’를 취재해 보라며 제보해왔다. 사하구 신평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당시 살던 집 근처에 ‘영화소’라는 부랑아 시설이 있었다고 했다. 그곳 어린이들은 모두 강제로 끌려온 것으로, 얼굴이나 팔에 멍이 든 아이가 많아 맞기도 많이 맞았을 거라고 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엄마, 말만 가지고 50년 전 일을 어떻게 취재하노?”
5년이 지나 손석주씨를 만났다. 그는 사하구 장림동 소재 부랑인 시설 ‘재생원’으로 억지로 끌려가 짐승 같은 삶을 강요당했다고 호소했다. 또 재생원 바로 옆에는 ‘영화소’가 자리했는데, 두 시설은 원장 한 사람이 운영하는 사실상의 동일 공간이라고 말했다. ‘말만 가지고 50년 전 일을 어떻게 취재하느냐’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비록 두 사람은 ‘영화숙’을 ‘영화소’로 착각할 정도로 유년 시절 기억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당시를 입증할 기록 자료는 없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분명히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인정받고 싶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이 전부가 아니다”며 눈물 흘리는 손씨의 하소연을 지나칠 수 없었다.
불우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살아야 한 그들은 수시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기자님, 앞으로도 우리의 이야기를 써주시고, 우리의 기록을 발굴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마다 기자는 ‘50년 전 일이라 취재가 쉽지 않습니다’며 거꾸로 하소연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럼에도, 지연된 정의가 불발된 정의보다 낫다고 믿으며, 국제신문은 계속해서 영화숙·재생원 피해실태를 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