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크론이 퍼지던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보도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19에 확진되거나 격리되면 중증 장애인들은 어떻게 하느냐. 특히 시시각각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답이 없다. 질병관리청이나 보건소에 문의해도 뾰족한 수를 알려주지 않는다. 중증 장애인이라는 제보자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준엄했다.
놀랍고 부끄러웠다. 지역의 감염 상황이나 자영업자의 어려움에 관한 취재는 여러 차례 했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본 적은 없었다. 문제다, 문제가 아니다를 논하기 전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소외받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이자는 평소 지론은 부끄러움을 더하기만 했다.
뒤늦게 눈과 귀를 열었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휠체어를 몰고 거리를 헤매야 했다. 자가 격리는 이제 잠시 쉬고 오는 기회 정도로까지 인식이 바뀌었지만, 중증 장애인에게는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살기 위해 모여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거리 두기’는 치명적이었다.
대책이 없다는 제보자의 지적 역시 정확했다. 장애인 감염병 매뉴얼은 존재에만 의의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구체적인 정책과 예산이 뒤따르지 못한 탓에 매뉴얼의 내용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3년째 계속된 장애인들의 외침은 듣는 이 없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유례없는 재난 속에서 장애인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돼 버렸다.
너무 늦은 이번 보도는 극히 일부만을 다뤘을 뿐이다. 옮기지 못한 장애인들의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직 재난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어떤 재난이 닥칠지도 모른다. 부족한 기사에 귀한 상을 주신 뜻은, 아픔과 차별이 또 다시 생기지 않도록 역할을 다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닫힌 귀를 열어 준 제보자와 취재에 큰 도움을 준 광주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감사의 뜻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