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말

[언론 다시보기]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

“과, 팀별로 부서원들만 밥값을 갹출하고 순번을 정해 (실)국장, 과장님들 식사를 챙겨요. ‘실,국(과)장 모시기’라고 하죠.”


얼마 전 모 광역시 공무원들의 직장 내 괴롭힘 실태를 조사하면서 접한 이야기다. 지난해 7월 대전시 9급 공무원이 부당지시, 각종 허드렛일 등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통을 겪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공직사회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왠지 ‘모신다’는 표현이 익숙했다. 불현듯 공인노무사가 되기 전 신문 기자로서 각종 정부 부처를 출입하던 시절의 몇몇 장면이 소환되었다. 기자실에서 기사를 마감하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공보실 담당자들이 다가와 건네던 말, “기자님, 오늘 저녁은 어디로 모실까요?” 10년도 더 지난 일이고, 이후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도 제정되었으니 이제 기자들이 출입처로부터 과도한 접대를 받는 일은 거의 사라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다만 의문은, “당시에 나는 왜 ‘모신다’는 말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는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지난해 필자의 사무실에 ‘직장 내 괴롭힘’ 상담을 요청했던 현직 기자들의 제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비록 출입처의 ‘기자님 모시기’ 등은 사라졌을지언정 언론사 내부의 낡은 조직 문화와 그로 인한 ‘직장 내 괴롭힘’은 여전히 존재함을 확인하곤 한다.


가장 자주 제보되는 괴롭힘의 유형은 ‘폭언(욕설)’, ‘모욕’, ‘반말’ 등이다. 그 수위도 매우 심각하다. 기자 사회의 뿌리 깊은 ‘선·후배 문화’와 ‘도제식 교육’ 등의 영향으로 언론사에서 타 직종에 비해 ‘말을 놓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반말’이 종종 폭언으로, 모욕으로, 욕설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괴롭힘의 ‘행위자’로 신고된 이들의 항변은 유사하다. “신고한 기자의 업무 능력이 부족하다, 그 정도 지적도 못 견디면 기자생활 못한다.”


돌이켜보면 필자도 과거 기자 시절 직·간접적으로 현행법에서 금지하는 ‘업무상 적정 범위를 벗어난’ 말들을 들은 경험이 있다. 데스크(부장)로부터 ‘욕설’을 듣거나, ‘벌 세우기’를 당하는 주변 사례도 목격했다. 그런데 당시 필자는 그 역시 큰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다. 왜일까?


‘이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불쾌한 감정 이상의 문제의식이 저절로 차단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그 험한 말을 듣고도 항의는커녕 더 열심히 취재에 임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근성있는 기자로 단련되는 과정’이라는 그릇된 착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건으로 상담을 요청한 다수 언론사의 기자들은 비슷한 고통을 호소했다. 상사로부터 폭언을 들었을 때보다 자신이 부당한 ‘갑질’을 신고한 뒤 ‘기자라는 직업과 맞지 않는 사람’, ‘기자 조직 부적응자’로 낙인찍히는 과정이 한층 괴로웠다고. ‘기자 바닥은 원래 그래’라는 말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조직에서 ‘사회통념에 비춰볼 때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섰는지 여부’라는 법률적 판단은 의미가 없어진다.


수십 년간 상급자의 식사를 챙기면서 ‘의전’이라는 미명하에 각종 ‘시중’을 들어야 했던 공무원들은 ‘뭔가 불합리하다’는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실·국장님을 잘 모시는 것’은 당연한 책무라고 받아들였다. 혹시 내가 속한 조직에서 이처럼 너무도 오래 지속되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겼던, 그러나 언론사 바깥의 상식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말들이 오가고 있지는 않은지, 새해 한 번쯤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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