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수기' 김 이사가 왜 그럴까?

[이슈 인사이드 | 금융·증권]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차장

이혜진 서울경제신문 차장

‘이사’만큼이나 혼동을 주는 직함이 드물다. 흔히 상무 전 ‘초임 임원’ 직급으로 사용한다. 직급 인플레이션 심한 회사에서는 이사가 넘쳐나기도 한다. 이런 ‘김 이사’님들은 회사의 경영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한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의 이사, 즉 상법상 등기이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들은 주주총회에서 승인을 받아 법인등기부 등본에 이름이 올라간다. 회사 내부에서 승진한 사내이사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영입한 사외이사도 법상으로는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등기이사다. 사장님이라 할지라도 등기이사 타이틀을 받지 못하면 ‘대표’일뿐 ‘대표이사’는 될 수 없다. 그래서 다 같은 이사가 아니다.


‘진짜’ 이사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정확히 말하면 막강하다고 법에 쓰여 있다. 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고, 의결권이 있기 때문이다. 상법상 이사회는 중차대한 경영 사항을 결정한다. 투자나 합병, 분할 등이 대표적이다. 대표이사를 선임할 권한도 이사회에서 갖는다. 회사의 미래 전략 설정도 할 수 있다.


이사회는 주식회사 제도에서 생겨난 거버넌스 체계다. 주주는 돈만 대고 경영은 경영진에 맡기다 보니 이들이 주주를 위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시시콜콜 감시할 수가 없다. 이에 주주가 이사를 선임해 경영진을 지원하기도, 견제하기도 한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이사회와 이사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총수나 CEO에 대한 기사를 주로 다뤄왔다. ‘OOO의 통큰 베팅’, ‘XXX의 승부수’와 같이 마치 총수나 대표이사가 모든 결정을 내리는 듯 보도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이사회 존재감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거수기, 방패막이가 흔히 붙는 수식어다. 회사들이 오너 일가와 친분이 있거나 검찰, 국세청, 공정위 등의 전관들을 이사로 채용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이 커지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결정을 내린 이사들에게 거액을 물어 주라는 법원 판결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최근 법원은 대우건설 주주가 전 이사진들에게 “4대강 사업 입찰 담합에 책임지라”며 낸 소송에서 이사들에게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해에는 망해가는 오투리조트에 150억원의 지원 결정을 내린 강원랜드의 이사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SK계열사의 이사회가 경영진이 추진한 대규모 투자에 제동을 거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의 사례다. 여전히 이사들은 경영진이 올리는 이사회 안건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전체 주주가 아닌 특정 주주, 즉 대주주 일가에만 유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결정을 내리는 이사회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유독 한국의 경영권 프리미엄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싼 이유, 경영진을 견제할 이사회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김 이사님’들이 왜 그런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위해 선관의무를 다하라’는 모호한 상법 규정 때문이다. 이에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상법 제 382조의 ‘이사는 회사를 위하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회사와 총주주를 위하여’로 개정하자고 주장해오고 있다. 특정 주주가 아닌 전체 주주를 위해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할 때 이사회 제도가 바로 설 수 있다. 거수기가 아닌 ‘막강 파워’ 김 이사님들의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제도 개선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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