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 300여m 쯤 떨어진 한 건물 지하. ‘이소룡(진번) 절권도 대한민국협회’란 팻말 옆 현관문을 여니 훤칠하고 탄탄한 몸매의 남자가 웃으며 맞이한다. 절권도란 무엇입니까. “최대한 빨리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고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효율적인 몸 움직임과 전략을 가르쳐주는 무술입니다. 준비동작 없이 모든 공격이 나가는데 그만큼 본인 에너지를 아끼면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효율성을 따지고요.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왔을 때 회피하지 않고 뚫고 나아갈 힘을 주는 무술로 보셔도 될 것 같아요.” 노경열 관장(부총교련)이 답했다.
영락없는 무도인은 5년 전만 해도 기자였다. 10년 간 언론사 밥을 먹었고 지금은 JKD KOREA란 도장을 운영한다. 군대를 전역하고 막 복학한 2002년 “내 몸을 실제 보호할 수 있는 무술”을 찾다가 절권도에 입문한 게 시작이었다. “꽂히면 다른 건 보지 않는 성격 탓에 남들이 하루 2시간씩 일주일에 2번 운동할 때 하루 12~14시간씩 운동을 했다.” 기자를 하면서도 운동 소모임을 이끌며 수련을 이어갔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번듯한 직장을 포기하고 아예 업(業)으로 삼았다.
“퇴근하면 시간 쪼개 운동하고 가르치는데 불만은 없었어요. 대만에 계신 스승을 1년에 한 번씩 만나 연습을 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해선 평생 가도 저 사람만큼 못 깊어지겠구나’ 싶은 거예요. 뭔갈 포기하고 뛰어들어야 저 수준까지 갈 수 있다 욕심이 들었고요. 기자하면서 많은 분을 만나 글로 녹이고, 화면에 담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는데 제 자신의 얘긴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그걸 써보고 싶었던 거죠.”
여러모로 일반 시선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들이었다. 97학번 원자력공학 전공자는 2006년 스포츠조선에 입사했다. 기자였던 양친 모두가 황당해 한 결정이었다. 부모의 바쁜 생활을 봐온 터 “기자는 절대 안할 생각”이던 그 자신으로서도 의외이긴 했다. “동기들은 한수원이나 한전처럼 늘 앉아서 일하는” 곳에 취업을 했는데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도장에서 코치 일을 하며 수많은 배경의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좋았고” “운동을 좋아하던” 그에게 스포츠 현장을 누비는 일은 맞춤하게 느껴졌다. 일로 배운 야구에 뒤늦게 푹 빠져 신나게 일했다. 다만 그에게 절권도는 이미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SK가 우승한 2007년, 그는 한국시리즈를 앞둔 김성근 감독이 도루·견제 훈련시키는 걸 취재하다 어떤 경지에 이른 야구와 무술이 통한다는 걸 확인한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어린 기자가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말을 거시더라고요. ‘노 기자, 투수가 홈으로 던질지 1루로 던질지 맞혀봐.’ 전 모르겠는데 감독님은 다 맞히더라고요. '사인 넣으셨어요?' 여쭤보니, 감독님이 '껄껄' 웃어요. 그러면서 투수 바지를 보라는 거예요. 주름이 2개면 몸이 덜 틀어져서 홈이고, 3개면 1루라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수련생들한테 절권도는 준비 동작을 배제하니 신경 쓰라고 했는데 정작 투수 준비동작을 전 못 본 거죠. 너무 재밌어서 다음날 아이템으로 냈다가 욕만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프런트보다 선수단과 친했던” 그의 방송사 이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포츠를 맡아 “인생을 걸고 엄청난 노력을 하는 프로선수들의 솔직한, 펜을 거치지 않은 모습을 가감없이 담아보고 싶었다.” 2011년 MBN으로 이직한 그는 정치부에서 통일부와 외교부를 출입하고 이후 산업부를 담당하다가 2016년 퇴사했다. 바람은 채워지지 못했지만 세상을 보는 시선을 키운 경험이었다. 돌아보면 힘들었던 기억이 가장 생생하다. 2011년 김태균 선수를 만나러 일본 지바로 갔다가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도쿄를 갑작스레 취재한 경험은 그중 가장 강렬한 쪽이다. “불 꺼진 아키하바라” “술만 남고 물건이 텅텅 빈 편의점”, “곳곳에 이불이 깔린 나리타공항” “여진으로 잠 못 들던 밤”이 떠오른다. 이륙 순간 ‘살았다’ 안도하던 때도 기억난다.
“무술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격렬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인데요. 기자생활과 비슷해요. 인터뷰이 인사말과 표정, 공간을 한눈에 보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어떻게 할지 등등 틀을 잡잖아요. 무술에서도 똑같거든요. 궁극적으로 상황을 내게 유리하게 풀려한다는 부분에서 배운 게 많죠. 기자를 하면서 넓은 세상 수많은 사람 가운데 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중구난방이라 보겠지만 사람과 만남, 얘기를 좋아한 게 큰 맥락인 거 같아요.”
사람과 만남의 양과 질, 무(武) 자체의 매력을 좇다보니 이만큼을 왔다. 일반인과 배우 등 개인·그룹 수업으로 25~30여명 수련생을 두고, 영화·뮤지컬 액션 자문을 맡기도 한다. 꾸준히 인터뷰 요청도 이어져 최근엔 국제신문 유튜브 콘텐츠 ‘고수를 찾아서’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 그에게 절권도는 어떤 의미이고 바람은 무엇일까. “저 자신한텐 공부고 완성하고픈 숙제예요. 퇴근해서 한잔하고, 내일 쓸 게 있으면 푹 자는 삶도 있었지만 지금 1분1초를 더 조심스럽게 쓰지 않나 싶어요. 석사 논문을 절권도로 썼는데 박사도 해볼까 고민 중이고요. 지난해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회복하는 게 올해 목표입니다. 태권도만큼은 아니어도 사람들이 배운다고 할 때 선택지 안엔 들어가는 무술까진 키워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