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의 재정의

[언론 다시보기] 노혜령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노혜령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지난 8년간 워싱턴 포스트(WP)의 격변기를 이끈 마틴 배런(Martin Baron) 편집국장이 보름 전 퇴임했다. 2013년 말 그의 취임 당시 WP는 ‘지역 신문’을 고수하고 있었다. ‘로컬 수익 모델을 가진 글로벌 신문’이라는 기묘한 정체성은 그 후 반년 만에 깨졌다. 제프 베조스가 WP 인수 직후 ‘글로벌 뉴스 기업’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업(業)의 재정의’는 어느 기업에나 중요하지만 언론계에서 제기되는 일은 드물었다. 신규 진입자가 거의 없는 과점 체제에서는 별 쓸모없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팩트 기반의 보도’ ‘불편부당’ 같은 직업 윤리가 모든 언론사의 정체성을 대신했다. 디지털화로 언론계가 전방위 경쟁에 노출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네이버, 페이스북 같은 빅 테크 기업은 물론 다양해진 뉴스와 정보 제공자가 다 경쟁자로 들어왔다. 이제 ‘업의 재정의’는 언론계에도 큰 숙제다.


뉴욕타임스(NYT)도 정체성을 ‘세계의 대중지’로 재정의했다. 핵심 독자층은 ‘영어를 이해하는 전 세계 대졸 이상 고학력자’로 바뀌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2008년의 한 연구에 따르면 1999년 NYT가 전국지로 전환한 이후 지역 신문들은 고학력 독자들을 뺏겼다. 지역 신문들은 돈 많이 들고 품질 격차가 벌어지는 국제 및 전국 단위 뉴스 대신 지역 콘텐츠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처했고, 이는 저학력 독자의 비중 확대로 이어졌다. 대규모 투자를 동원한 콘텐츠 품질 향상과 그 투자비를 회수할 가치사슬 혁신의 경주가 한바탕 펼쳐질 때마다 승자들의 과점이 강화된 것은 반복돼 온 미디어 산업의 역사다. 디지털은 이 현상을 한층 강화한다. 세계적 뉴스 구독 붕괴 속에서 NYT의 나홀로 질주(2020년 말 유료구독 750만명)가 이를 보여준다. NYT는 자체 개발한 폐쇄형 디지털 플랫폼 상에서 콘텐츠 생산, 유통, 광고 및 구독 수익화까지 전 가치사슬을 통제한다.


반면 WP는 아크(Arc)라는 자사 플랫폼을 외부에도 개방(유료 서비스)해 생태계 참여자들을 결집하는 전략을 택했다. NYT는 애플의 iOS, WP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방식에 가깝다. WP의 정체성은 글로벌 언론 생태계의 플랫폼 표준 제공자로 차별화된 셈이다. WP의 자체 유료 구독자는 300만여명이지만, 아크 플랫폼에서 등록 또는 유료 구독하는 독자는 1400개 웹사이트 총 5000만명(2020년 11월말 현재)을 넘는다. 합류하는 언론사가 늘어날수록 아크 플랫폼에 모이는 뉴스 독자들의 ‘진성’ 데이터 풀(pool)은 커진다. 아크 개발자들이 구글 못지 않은 AI-기반 매칭 기술을 업데이트해 가면서 아크에는 언론사, 독자, 광고주들이 더 많이 모일 수 있다. 언론사들은 데이터 주권과 수익 모델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게 WP의 주장이다.


어느 편이 성공할지 예단은 힘들지만 WP와 NYT는 각자 ‘정체성’을 재정의해 가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 경제라는 이 신세계에서는 콘텐츠와 플랫폼 전략의 두 바퀴가 맞물려야 생존한다. 플랫폼을 자체 개발할까, 다른 플랫폼 생태계에 합류할까. 데이터 주권과 수익모델 통제력에는 어느 플랫폼이 유리할까. 장기적 경쟁 우위를 가져다 줄 콘텐츠 전략은 무엇인가. 이런 정답 없는 질문들을 파고들며 업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능력이 언론사의 생존에 필수가 됐음을 배런 국장의 여정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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