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게 '좌표' 찍히는 기자들

[지지자들 무차별적 인신공격·성희롱]
정치인, SNS에 기자 실명 올리면
네티즌이 해당 기자 신상털어 공격

이재정 "자신이 쓴 기사 책임져야…
'좌표 찍기' 프레임 몰기, 논의 막아"

지난달 A 기자는 자신을 향한 인신공격과 욕설이 담긴 메일을 무수히 받았다. 한 여당 국회의원이 개인 페이스북에 A 기자의 실명을 언급하며 기사를 비판한 게시글을 올린 이후였다. 해당 의원이 기자 이름을 태그한 게시글에는 욕설과 기자의 신상정보가 담긴 악성 댓글 90여개가 달리기도 했다. A 기자는 “‘좌표’(기사, 기자 이름)가 찍힌 페이스북 게시글이나 해당 기사에 저를 특정한 악플이 무수히 달렸고, 이메일로도 악플이 왔다”며 “맥락과 무관한 인신공격, 비방, 외모 평가, 여성 혐오적인 표현이 훨씬 더 많았다. 게시글의 취지와 달리 비생산적인 혐오 표현만 양산된 셈”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개인 SNS 계정에 언론 보도를 비판하며 기자 실명을 언급하면 지지자들이 해당 기자를 저격해 악플을 달고 욕설 메일을 보내는 이른바 ‘좌표 찍기’ 현상은 A 기자만의 일은 아니다. 최근 이재정·정청래·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페이스북에 기자 실명을 태그한 글을 게시해 논란이 된 바 있다. 기자는 자신의 바이라인이 달린 기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만큼 잘못된 보도에 대해 실명 비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적잖다. 하지만 실명 거론이 기사에 대한 비판, 해명의 목적에서 벗어나 기자들을 향한 과도한 인신공격과 성희롱 등의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B 기자는 “그동안 기사에 문제가 있다면 의원이 따로 연락해 틀린 부분이 있으면 조정하거나 기사 링크를 걸고 그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던 방식이었다”면서 “언제부턴가 정치인들이 기자 실명을 거론하고 있는데 기사에 대한 비판보다 기자를 향한 열성 지지자들의 인신공격, 악플 공세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다고 본다. 건전한 정치와 언론의 관계를 말하면서도 지지자들을 이용한 언론 길들이기 아니냐는 의심도 든다”고 말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文 대통령, ‘잘못하고 있다’ 50.3%···추미애·윤미향 여파> 기사를 쓴 기자 이름을 올리며 “본문 내용이 대통령 지지율도 오르고, 민주당 지지율도 올랐다면 기사 제목으로 야당의 과도한 추미애 공세 안 먹혀, 야당의 막가파식 폭로 역풍 조짐, 야당의 지나친 공세로 오히려 지지율 까먹어. 이게 정상 아닙니까?”라는 내용의 게시글을 올렸다. 지난달 9일 이재정 의원은 자신의 라디오 인터뷰 발언 인용이 잘못됐다며 <“카투사 자체가 편한 보직”…불길에 기름 붓는 여당 의원들> 기사를 링크해 기자 실명도 함께 태그했다. 이후 해당 사안과 관련해 이 의원을 비판한 기사를 보도한 기자 이름을 게시하기도 했다. 홍익표 의원은 지난 8월 본인의 페이스북에 <한은 총재 불러놓고 “아파트값 잡으라”는 與의원들> 기사와 기자 실명을 언급하며 “양적 완화해도 돈이 실물경제로 이어지는 것보다 자산 버블이 더 커지니 한은이 보다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하라고 한 것”이라며 “모르고 썼으면 무능한 기자고, 알면서 이렇게 기사 제목 잡고 쓰면 기레기 소릴 듣는다”고 했다.



특히 여성 기자들의 경우 노골적인 성희롱을 당하는 등 피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C 기자는 “여성 기자들은 더욱 성적 폭력에 노출돼 있다. 저에겐 ‘가만두지 않겠다’, ‘찔러 죽이겠다’는 메일들이 왔는데 다른 여성 기자에게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성적 모욕이 담긴 메일이 쏟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너 이름으로 기사를 썼으니 당해도 싸다’고 하는데 과연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런 성적 모욕을 당해도 싼 건가. 여당 의원이라는 무게와 기자들이 당할 피해는 생각하지 않은 폭력적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기자들은 ‘좌표 찍기’가 국회의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봤다. D 기자는 “실제로 한 기자가 한 시민에게 물리적 위협을 당한 일이 있었다”며 “기자들이 직접적인 테러 위협까지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이 아닌 공인인 국회의원들, 특히 180석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여당 의원들이 기자 개인을 상대로 좌표 찍기 현상에 편승해 테러 행위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A 기자는 “공인일수록 담론을 공론화하는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상대방이 동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지자들과 혐오표현을 나누며 만족하는 데 그친다”며 “정치인이 앞장서 언론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행보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정 의원은 6일 기자협회보에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기자 실명 공개에 대해 “기자는 언론사와 더불어 본인이 작성한 각 기사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 개인의 책임과 기명 비판이라는 부분과 시민들의 비판 방식과 경향에 대한 논의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좌표 찍기’ 프레임으로만 몰아가는 것은 정치와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시민이 그 책임을 묻거나 비판하는 방식에 대한 합리적 수용범위 등에 대한 발전적 논의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저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비난과 공격에 항상 노출돼 누구보다 관련 문제에 인식을 같이하고 연대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서 “정치권과 언론도 감정적 대립이 아닌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한 차분하고 냉정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정청래 의원은 6일 기자협회보와의 통화에서 “국민들이 개혁 대상으로 검찰과 언론을 꼽는다. 왜 개혁의 대상이 됐는지 언론이 생각해봐야 할 때”라며 “언론도 권력이다. 권력은 다 감시받아야 한다. 기자도 국회의원을 실명으로 비판하듯 국회의원도 기자를 실명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회의원은 되고, 기자는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박지은 기자 jeeniep@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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