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형사처벌 가능한데… 정치권 '징벌적 손해배상제' 추진

[Cover Story] 정청래 민주당 의원, 언론중재법 개정안 발의… 언론·시민단체 당혹

21대 국회가 개원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적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돼 논란이 일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주장해왔던 언론시민사회단체조차 관련 논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채 법안이 발의돼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언론계에서도 언론 보도에 대해 형사처벌이 가능한 상황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까지 도입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일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골자로 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로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법원이 손해액의 3배를 넘지 않은 범위에서 손해배상을 명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발의 후 지난 11일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국기자협회를 포함한 언론중재위원회, 한국신문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 등 관련 단체들에 의견을 요청하며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논의가 본격화돼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제도 도입을 제안했고, 2013년엔 정청래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다만 이후 언론 환경이 급변했는데도 충분한 논의 없이 갑작스레 법안이 발의돼 언론시민사회단체 안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는 “우리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처음 주장한 게 2004~2005년 즈음이다. 당시만 해도 사건 보도에 실명과 동네 이름이 다 나와 사법부의 판결과 별개로 개인이 이중처벌을 받는 상황이었고, 오보의 경우 피해가 더 심각했다”며 “언론에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기 위해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다만 시간이 흘러 언론 환경이 많이 바뀐 만큼 이 부분을 논의해야 하는데 정치권 중심으로 법안이 발의돼 굉장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정청래 의원의 법안 발의를 정치적 의도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 방송사 기자는 “자기 입맛에 맞지 않은 보도를 한 기자와 언론사를 입막음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한 기사를 두고 정파적으로 해석이 갈리는 상황에서 과연 악의적인 보도를 누가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금태섭 전 민주당 의원 징계 건에서 보듯 소신 있는 목소리와 의도를 가진 음해는 최근 들어 종이 한 장 차이로 해석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도 “지금은 정상적으로 언론 문제를 지적하는 차원이라기보다 언론 혐오를 분출하는 상황으로 보인다”며 “물론 언론이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그 문제를 적확하게 지적해 고치려는 이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언론을 흔들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큰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 논의 자체가 부적절하고, 제도가 도입된다 해도 제대로 작동할지 확신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제안된 근본 원인에 언론의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고 ‘정청래 안’을 뛰어넘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언론계 내·외부를 가릴 것 없이 높았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특정 정치세력이 언론 불신에 기대 발의한 법안으로 보여 우려스럽다”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정치인, 고위공직자 등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을 위한 것이라면 사회 전체적으로 차분히 논의해봤으면 한다. 현행 제도 안에서 피해구제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부터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까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언론시민사회단체에선 ‘정청래 안’과 별개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관련한 내부 논의를 진행할 방침이다. 제도 도입에 앞서 소비자 관점에서 제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겠다는 취지다. 언론인권센터에선 내부 토론회를 계획하고 있고 민주언론시민연합도 다음 달 중순 워크숍을 갖기로 했다.


신미희 민언련 사무처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갖는 의미와 도입으로 우려되는 문제점, 보완점들을 집중적으로 논의해보기로 했다”며 “중요한 건 악의적인 허위 왜곡 보도로 소비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현행 제도나 법이 제대로 피해구제를 못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본질적인 배경과 현황에 대한 분석을 먼저 하겠다”고 말했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적용하자는 법안이 발의돼 논란이 일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주장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충분한 논의 없이 법안이 발의돼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해당 법안이 논의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 모습. /뉴시스

◇관련 법제 정비부터 저널리즘에 대한 사회적 합의까지…열린 자세로 논의해야
언론계도 언론에 책임이 있음을 일정 부분 통감하며 열린 자세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다만 이미 규제 성격을 가진 제도와 법적 장치들이 많아 관련 법제 정비가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오픈넷 이사인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민사 손배제가 매우 허약하다. 만약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되면 폭력이나 비리처럼 당장 실질적인 피해 발생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은 없고 그 사실을 고발한 행위에 대해서만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라며 “일반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은 찬성하지만 언론에만 적용하는 것은 폭력과 비리를 고발하는 언론 활동을 어렵게 만들어 사회를 더 퇴보시킬 수 있다. 그보다 앞서 우리나라 민사 손해배상제도부터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언론 보도에 대한 형사처벌을 없애고 반대급부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언론법학회 부회장인 조소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언론 분쟁을 보면 형사처벌을 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은 언론 소송이 대부분 민사인데 우리는 형사, 민사를 같이 간다”며 “언론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손해배상액을 형벌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면서 그 대안으로 내놓은 게 이 제도다. 관련 법제 정리 없이 무조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건 방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언론위원장을 역임한 김준현 변호사도 “언론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형사처벌을 유지하면서 징벌적 책임까지 같이 묻는 것은 과도한 것 같다”며 “책임을 묻는 방식이 형사냐 민사냐고 한다면 민사로 가는 것이 맞고, 그렇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면서 적어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폐지해야 한다. 사실을 적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자들이 소송을 당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했다.


한편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정치인 등 공인이나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악용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관련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미국의 경우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공인에 대해선 ‘현실적 악의’를 증명하게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사실상 공인에 대한 비판엔 적용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오정훈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악용될 경우 대기업이나 정권, 수구 적폐 세력들이 오남용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진영을 가릴 것 없이 사회악을 고발하고 문제를 들춰내는 언론 본연의 활동에 제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 언론사와 기자를 괴롭히기 위해 소송을 하는 이들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언론인 출신인 허윤 변호사는 “언론이 고의적이고 악의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면 처벌받는 것이 맞지만 반대로 열심히 취재하고 제대로 기사를 썼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언론사와 기자를 괴롭히려고 소송을 내는 경우가 실제 많다”며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고 위축효과를 초래하는 소송에 대한 제재 조항 또한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는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기에 상대방도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 대상이 돼야 균형이 맞다”고 말했다.


극심한 진영논리 속에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보도는 현실적으로 ‘내 편이 아닌 보도’로 통용될 수 있기에 우리 사회가 어떤 보도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지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심석태 교수는 “언론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목적으로만 보도했다면 3배, 10배를 넘어 한도 없이 배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언론 혐오가 팽배한 상황에서 어떤 보도가 의도적이고 악의적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으며 관련 논의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지금은 정상적인 보도까지 문제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무너진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늦었더라도 지금부터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어떤 저널리즘은 문제가 되고 어떤 저널리즘은 인정해줘야 하는지 논의를 해봐야 한다. 정파를 떠나 우리 사회가 절대로 용납해선 안 되는 보도가 무엇인지, 부끄러운 보도는 무엇인지 엄밀하게 정의해야 한다”며 “그래야만 문제가 된 저널리즘을 엄하게 처벌할 수 있다. 지금처럼 내 마음에 안 드는 보도에 아무데나 ‘기레기’ 딱지를 붙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


기자 사회에서도 반성과 함께 자정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이봉현 한겨레신문 저널리즘 책무실장은 “언론이 현재와 같은 뉴스 품질을 가져가도 되느냐, 독자들이 많은 우려를 하는 것 같다”며 “개선을 위해선 언론이 자율적으로 사실 보도에 충실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오보 등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사과와 정정을 하는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 실장은 “저희가 책무실을 만들고 조선일보가 ‘오직, 팩트’를 외치니 언론계에도 확산 효과가 좀 있는 것 같다”면서 “이런 노력을 하는 언론사에 사회적 인센티브를 주는 구조를 만든다면 서로 정확성 경쟁이 이뤄지는 등 좋은 방향으로 언론 개혁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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