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신문지는 있어도 새 소식을 담은 신문은 없었으며, 그따위 신문 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은 언론인이 아니라 언롱(弄)인이라며 경멸한 것이 좋은 예다.”
1988년 리영희 선생이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 글의 한 대목이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우리 사회의 거짓과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기자들을 향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리영희 재단과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지난 8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함께센터에서 리영희 선생 작고 10주기를 맞아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비판과 실천’으로 대표되는 리영희 선생의 언론사상을 되새기며 그의 정신이 오늘날 언론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논의했다.
‘기자 리영희’ 세션에서 발표를 맡은 박영흠 협성대 초빙교수는 리영희 선생이 생각한 이상적인 기자는 ‘독립적·비판적 지식인으로서 기자’라고 했다. 박 교수는 “만약 리영희 선생이 2020년에 다시 <후배 기자들에게 하는 당부>를 쓴다면, 무엇보다 먼저 조직의 통제와 낡은 관행의 구속부터 벗어던지라고 조언하지 않을까 싶다”며 “기자들은 외부의 힘으로부터의 독립에는 민감하지만, 내부의 힘에 종속되는 상황에는 너무 쉽게 눈을 감아버린다. 내부의 힘은 사주, 간부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결정된 뉴스 가치, 출입처 제도 등의 뉴스 생산 관행도 포함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판의 재정립도 필요하다. 오늘날 언론도 일상적으로 비판을 수행하고 있지만, 비판을 통한 진실 추구가 목적이 아닌 별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능적 수단으로서 비판이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토론자로 나선 정필모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 당선인(전 KBS 부사장)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팩트를 가장해 왜곡하는 보도가 여전히 많다며 그 원인으로 언론사 내부 조직문화를 꼽았다. 정 당선인은 “‘KBS에 소위 개혁적 경영진이 들어섰지만, 왜 기대했던 만큼 뉴스가 달라지지 않냐’는 시청자들이 많다. 현재 경영진은 정치권의 압력을 받지 않고 제작 자율성을 100% 보장받고 있지만 왜 시청자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그 이유는 조직문화 때문”이라며 “오랫동안 내려온 기자들 특유의 뉴스룸 관행의 문제다. 기자들의 특권의식, 조직 보호 본능, 조직 이기주의 등이다. 결국 내부에 개혁을 맡겨선 안 된다. 언론 소비자 운동 등 바깥의 충격이 없으면 언론개혁은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승호 뉴스타파 PD(전 MBC 사장)는 언론사의 정파성과 경영 위기 문제에 대해 “기성 언론이 ‘코로나19 확진자 수를 총선 결과에 맞추기 위해 줄이고 있다’는 가짜뉴스를 가감없이 소개하는 것 등을 보며 언론의 정파성이 극한의 상황까지 와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이어 “뉴욕타임즈의 2019년 광고 수익이 2006년 수익의 4분의 1일 정도로 해외 언론의 경우 디지털화가 되면서 수익이 급격히 떨어졌다. 한국의 지상파도 경영이 어렵다. 하지만 종편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의 언론시장이 외국과 차이가 있는 논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며 “이 사실이 저널리즘 내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언론개혁을 해나갈 때 이 문제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리영희 선생이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지낼 때 함께 근무했던 신홍범 도서출판 두레 대표의 회고도 이어졌다. 신 대표는 리영희 선생을 ‘생각하게 하는 것을 가르쳐준 은사’라고 표현했다. 그는 “언론인,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이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것”이라며 “베트남 전쟁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룬다는 것은 당시 이 전쟁에 5만명의 전투부대를 파병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한국의 신문들이 파병 이후 ‘반공 성전’, ‘자유진영과 공산주의의 투쟁’으로 전쟁을 묘사하면서 전쟁열을 부추기고 있을 때 유독 그만이 비판적인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기사를 썼다”고 말했다.
또 “그에게 진실이 그토록 중요했던 건 진실 속에 지향해야 할 가치와 미래가 들어있기 때문”이라며 “진실은 거짓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엔 가야 할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들어있다. 리영희 선생이 가고자 했던 미래는 인간해방과 사회의 진보였다”고 했다.
박지은 기자 jeeniep@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