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찰이 정유라를 잡아서 한국으로 돌려보낼 일은 있겠냐. 독일 국내도 테러 발생 등으로 할 일이 적지 않은데 적극적으로 외국 정부의 요청에 협조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소추한 뒤로 1인당 2만9000원의 망년회의 화제는 대개 ‘최순실 게이트’였는데, 한 고위 공무원은 저렇게 분석했다. 한국 경찰이 정유라씨를 인터폴 적색수배 명단에 올렸다는 뉴스를 보면서 시민의 기대와 달리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주요 책임자로 지목된 유병언의 딸 섬나씨가 프랑스 파리법정에서 공방을 벌이며 2016년 연말에도 서울로 송환하지 못한 상황도 거론됐다.
이런 비관적 전망을 뒤집는 속보가 지난 2일 오전에 있었다. ‘정유라 덴마크에서 체포’였다. 상큼한 새해 첫 월요일의 시작이었다. ‘정의가 마침내 승리한다’는 상큼한 기분은 그러나 JTBC의 보도와 ‘주관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들해졌다. 민간 언론사 기자도 찾아내는 정유라의 해외 은신처를 한국의 검찰은 왜 못찾아내는지 분통도 터졌다. 한국 검찰과 경찰의 의도적 무능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JTBC 기자는 교민의 제보로 정유라씨가 덴마크에 은신한 집을 찾아냈고 ‘뻗치기’를 하다가 정씨 일행이 도주 우려가 있다며 덴마크 경찰에 이들을 ‘불법 체류’ 등으로 신고해 국내 어느 언론도 접근할 수 없는 그야말로 JTBC의 단독보도 영상을 따냈다.
‘기자의 신고로 정유라 덴마크서 체포’라는 현상은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던져줬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시민의 책무에서 기자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언론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기사를 써야 하는가 아니면, 행동해야 하는가? 범죄나 테러 등과 같이 선악이 비교적 선명한 경우에는 답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가 블러(blur)한 정치의 영역에서는 기자가 ‘정의’를 위해 기사화하는 이외에 어느 수준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결정들이 달라질 수 있다.
10년 안팎의 젊은 기자들은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신고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일부 언론학 교수들도 ‘사안의 중대성’을 거론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행위였다”고도 평가했다. 그렇다면 남파 간첩을 발견하거나, 테러 혐의자를 발견했을 때 기자는 그를 공권력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기사를 쓰고 그 취재원을 보호할 것인가.
‘언론은 관찰하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낡았다고도 한다. 1970년대 대두된 ‘곤조 저널리즘(gonzo journalism)’ 같이 취재대상에 대한 주관적 개입을 강조하는 저널리즘이 미국 바이스미디어를 통해 각광받는 상황에서 ‘객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낡은 관행이자 낡은 철학이라는 것일까?
기자들은 특종을 위해 몸을 던지지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자각도 강하다. 1980년대에는 국회 회의장 테이블 밑에 숨어 특종한 영웅담이 횡횡했다. 정치부 기자들의 주특기인 ‘벽치기’로 특종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국회 복도까지 통제한다. 1990년대 말까지도 출입처 책상 위에 놓인 문건을 집어와 특종하는 일이 적지 않았으나, 이제 대부분의 서랍은 잠겨 있다. 그 무렵엔 법조 출입기자가 부장검사 방에 숨어들어 컴퓨터에서 자료를 내려받아 기사를 쓴 무협지 같은 일도 있었지만,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유죄가 됐다. 기술의 힘을 빌려 정치인들의 발언을 도청했다가 사법처리도 됐다.
기자들의 취재행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면 현실 법의 잣대를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이브하고 편의적이다. 정의와 진실의 발굴 역시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 한! 이라고 주장하면, 너무 낡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