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정연주는 언제나 나올 수 있다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2.01.18 16: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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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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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1월12일 정연주 전 KBS 사장에 대해 무죄를 확정해 3년여 묵은 피고인 사슬을 벗겨줬다. 무죄의 사안으로 우리나라 대표 방송사의 사장이 파렴치한 경영인으로 몰려 검찰에 끌려가고 오랫 동안 피의자와 피고인으로 살았다. 그를 얽기 위해 보수단체가 고발하고 감사원, 검찰이 큰 수고를 했다. 이에 앞서 교육부, 동의대, KBS 이사회,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등이 역할을 나누고 일부 언론은 박자를 맞춰줬다. 그가 쓴 ‘정연주의 증언:나는 왜 KBS에서 해임되었나’에 전말이 충실하게 기록돼 있다.
정권은 그렇다 치고 이 기록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KBS 내부에서 정연주 사장을 밀어내는 데 협조한 인사들의 행태다. 사장 제거 작전을 불붙이기 위해 전직 KBS 직원은 업무상 배임으로 현직 사장을 고발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고참은 보직을 떠나야 하는 달의 중간에 요란하게 보직사퇴 쇼를 통해 그를 비난했다. 상하 직원들은 틈만 나면 그를 흔들어 대고 지지하는 후임 사장에 대해 간접광고를 했다. 보수 노조는 지능적으로 움직였다. 세월이 지나 이들 대부분은 자리를 챙겨 ‘먹튀’했다.
이런 내부 인사들의 모습은 공영방송 KBS와 MBC에서 낯설지 않다. 이들은 현재 사장을 포함해 적대적이거나 위협이 되는 이들에게 비수를 들이대 제거한다. 지지자를 밀기 위해 정권이나 외부 세력과 결탁해 멍석을 깔고 옹립 작업을 한다. 회사발전을 위해, 회사를 사랑해서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한 자리를 챙겨 먹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지 못한 낙하산 사장이 내려올 경우 내부협조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인연으로 뭉친 왕당파가 있고 불러주기를 학수고대하는 들쥐형 인사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낙하산과 낙하산을 떨어뜨린 세력의 심기를 읽어 원하는 대로 인사, 편성, 제작, 뉴스 편집을 밀어붙인다. 역시 먹튀의 일종이다.
주인 없는 회사에서 나타나는 생존과 번영의 양식이다. 이는 일반적 현상으로 어느 정권에서나 일어난다. 정권이나 외부 세력으로서는 내부 가이드와 길안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한다. 신통한 일은 제거와 옹립 작전에 한 번 관여했던 직원이 다음 기회에 다시 길안내를 자임하는 것이다. 숨 쉬는 것조차 정치적이고 상습 먹튀가 생활화된 인물이 제법 있다.
요즘 공영방송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방송사에서 슬픈 정치화는 왜 일어났을까. 정치화를 막기 위한 구조는 없을까. 이른바 선진 방송사는 어떻게 문제를 풀어냈을까. 만약 방송사에서 정치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직원들이 정권의 의도에 호응하지 않고 자기 일을 원칙대로 처리했다면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랬더라면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오늘 KBS, MBC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번 생각해 봄직한 질문이다. 불행하게 해답은 간단하지 않고 마땅치 않다.
입만 열면 말하는 공영방송 모델인 BBC에서 우리가 놓치는 대목을 들라면 언론에 대한 정치권의 불간섭이다. 이 생각은 사장을 뽑는 이사회 구성에서 구현된다. 숫자가 많은 BBC 이사는 여야 정치권의 영향을 덜 받는 상태에서 이사회에 들어오고 전문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사들의 충성심은 기본적으로 선임해준 조직보다 시민사회로 향한다.
사장의 기준과 자격은 언론의 임무를 썩 잘 해야 하는 공영방송을 이끌 수 있느냐에 있다. 적어도 업무에서 뛰어나고 신뢰 받는 인물이라야 될 수 있다. 그리고 사장으로서 검증되고 나면 오래 재임하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지성과 권위로 부상한다. 독립적 이사회의 지원과 보호아래 검증된 사장이 오래 재임함으로써 공영방송은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싸우는, 어렵지만 옳은 일을 할 수 있었다. BBC스러움은 제도적 뒷받침과 상하 임직원의 결단으로 역사와 전통이 되면서 정권을 포함해 누구도 의문을 갖지 못하게 됐다.
우리는 수십 년 공영방송의 총론을 말했지만 사장을 뽑는 구조라는 각론에 눈감았다. 정치권이 선임한 KBS 이사회와 MBC 방문진은 근엄한 공모 절차를 거치면서 정권이 찍어 내려온 사장을 추인하는 문서에 고무도장을 찍었다. 이사들은 뽑는 척 연기하고 국민은 알면서 연극을 관람했다. 정권이 금도를 보일 경우 괜찮은 인물이 사장으로 뽑히지만 권력이 상식을 잃을 경우 하질, 저질의 진입을 막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 방식은 철저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여론과 비난을 의식해 잠시 금도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다음과 이어지는 정권에서는 기약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실행에서 악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장 결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손봐야 한다. 그대로 두면서 총론만 그럴 듯하게 말한다면 정권이 공영방송을 지배하겠다는 뜻을 가졌다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제2의 정연주는 등장할 수 있고 왕당파와 들쥐는 항상 대기 중이다. 공영방송의 미래는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