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받아쓰는 언론
[언론다시보기]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webmaster@journalist.or.kr | 입력
2011.12.13 14: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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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민 전 MBC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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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언론에게는 전문 지식과 판단이 필요할 경우가 많다. 금융, 무역, 법률, 과학 분야가 대표적이다. 과학과 관련해 최근 황우석 사건, 광우병, 구제역, 유전자 조작식품, 멜라민, 4대강 등 이슈가 있었고 건강, 식품, 환경, 기후변화, IT를 망라한다. 이런 이슈에는 정치 경제 사회 국제적 이해가 얽혀있어 판단이 어렵다. 예를 들어 언론이 4대강에 대해 찬반의 입장을 펼 수 있지만 출발과 끝은 과학이어야 한다. 그래서 문외한인 기자와 언론이 당국의 설명을 쫓아가면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당국의 설명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합당한 비판을 하려면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판단과 용기를 지녀야 한다.
최근 선관위 사건을 지켜보면서 언론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언론은 사건 명칭부터 정확했는지 물어야 했다. 사건내용을 보면 10월 26일 아침 두 시간 이상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소 안내 메뉴가 다운됐다. 원인이 분명하지 않아 디도스 공격, 해킹, 내부 데이터 베이스의 다운 중 하나 내지 두 개가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사건의 이름은 “선관위 투표소 안내 메뉴 마비사건”이고 줄이면 “투표소 메뉴 마비 사건”이 맞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사건”이라고 부른다면 한 측면을 강조하면서 다른 중요한 측면을 가리는 것일 수 있다. 시작부터 피의자 혹은 수사당국이 만든 프레임에 들어가 있다.
경찰은 좀비 PC 200대 정도가 선관위 사이트를 공격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이트를 마비시키려면 200대 정도로 어림없다. 요즘 내가 나가는 대학에서 봄 가을 학기 초 수강신청을 할 때마다 인터넷 전쟁이 벌어진다. 한 강좌에 200~300명 이상이 한꺼번에 들어와 전체 대학으로는 수만 대가 몰리지만 대학 사이트가 마비되지 않는다. 모든 대학생들이 학기 초마다 당면하는 일이라서 누구에게 물어도 다 안다. 선관위 사이트가 200대로 마비됐다면 국가적으로 문제다. 그날 디도스 공격은 있었겠지만 투표소 안내 메뉴만 마비된 점을 보면 실제로 그런 문제는 없었다.
메뉴에 대한 공격은 차원이 다르다. 이라크 전에 비유하자면, 선관위 사이트 공격이 바그다드 중심가에 대한 일제 타격이라면 투표소 메뉴 공격은 후세인 궁의 특정 사무실을 때리는 첨단 정밀 무기의 공격에 해당한다. 메뉴가 마비되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 있다. 데이터베이스의 해당 부문 전원이 고의나 실수로 꺼졌거나, 기술적인 문제로 잠시 마비됐거나,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을 당한 것이다. 고의나 실수로 전원이 꺼지는 경우는 음모설에 치우치는 것이어서 제외해 보자. 기술적인 문제라면 선관위가 바로 밝혔을 것이고 로그인 기록과 문제 대응 등 모든 점에서 침묵하고 있어 제외해 보자. 남은 가능성인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이 유력하다면 첨단 신기술을 써야 하고 메뉴의 정확한 메뉴 주소를 알아야 한다는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확한 메뉴 주소를 아는 방법이 문제로 등장한다.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우선 해킹 전문가를 동원해 맨땅에 헤딩 방식으로 알아내는 방법이다. 창이 있으면 방패가 나오고 다시 정교한 창이 등장하기 마련이라서 반드시 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문제는 시간과 돈이다. 해킹 전문가 3~4명이 일주일 정도 작업을 해야 알아낼 수 있다.
간편한 방법은 메뉴 주소를 아는 사람에게 받아 적는 것이다. 간편한 이 방법은 간단하지 않다. 주소를 알거나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선관위의 컴퓨터 관련자와 지휘관, 물어볼만한 위치에 있는 외부 인사이다. 헌법기관인 선관위에게 많은 주소 중 투표소 메뉴 주소를 물을 수 있는 간 큰 외부 인사는 극히 드물다. 센 기관의 센 자리에 있거나 주모자와 사적 인연을 가진 인사일 것이다.
과학을 따라가면 수사당국이 누구를, 어느 곳을, 어떻게 수사해야 하는지 분명하다. 만약 경찰 발표를 충실하게 믿어 디도스 공격이 9급 공 모 비서와 도박 사이트 전문가의 주도로 몇 시간 전에 결정돼 실행에 들어갔다면 메뉴 주소를 알았다는 말이 된다. 주소를 몰랐다면 적어도 한 달 정도 기간이 들어갔고 돈이 솔솔이 많이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경찰 발표는 앞뒤 맞지 않는 엉성한 다큐멘터리이고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당국의 발표라서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헌법의 기초를 흔드는 사안의 엄중성에 비해 언론은 충분한 관심을 두지 않아 12월 2일 경찰의 확인이 있기까지 한 달 넘도록 중간 보도가 나오지 못했다. 경찰은 언론이 물어서 답한 것이 아니라 정치권이 의원 비서 연루설을 묻자 황급하게 시인했다. 정황을 볼 때 경찰이 공 씨를 붙잡은 뒤 뭔가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보였다.
판타지 소설을 받아 적는 일은 작가 보조역에 지나지 않는다. 언론이 소설 필경사 노릇을 하면서 보도를 믿어달라고 시민에게 읍소할 수는 없다. 막 시작된 검찰 수사에 대해 늦었더라도 언론의 원칙으로 돌아가 지켜보도록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