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되어 공영방송 되살리겠다"
언론노조 KBS본부 준비위원장 엄경철 기자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 입력
2009.12.23 15:44:46
KBS 새 노조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엄경철 기자(수신료프로젝트팀)는 본연 업무와 노조 활동을 병행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한 형편이다. 인터뷰가 예정된 18일 오후에도 수신료 프로젝트팀 워크숍에 막 다녀오던 길이었다. 노조 사무실이나 전임자도 없고, 교섭권 인정도 기약할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는 노조 건설에 강행군이었다.
그는 기자생활 16년 동안 노동조합 근처를 얼씬거리지 않은 KBS 구성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지난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언론고문을 지낸 서동구 씨를 KBS 사장에 임명하자 서씨의 출근을 저지하는 노조 대열에 합류한 것이 전부였다. 그의 표현대로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잘하겠지’하는 방관자 부류였다. 그런 그가 새 노조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초대 노조위원장이 됐다.
“지난해 8월 정연주 사장이 권력에 의해 축출당하고 이병순 사장이 오는 과정에 노조가 제 역할을 못하면서 공영방송의 기반이 무너졌어요. 그 결과 보도·제작 등 여러 분야에서 자율성이 훼손되고 사내 분위기가 억압돼 갔죠. 처음엔 분노하던 후배들이 점차 절망하고 체념하더군요. 이대로 두면 KBS 구성원들의 열정이나 순수성, 저널리즘에 대한 지향성이 싹조차 말라버리지 않을까 우려됐어요.”
그는 새 노조 건설을 추진하면서 두 가지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KBS가 공영방송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김인규 사장 체제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시사프로그램과 뉴스의 정상화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조합원들의 참여를 어렵게 만드는 경직된 노조 문화를 개선하는 것도 그의 고민 지점이다. 싸울 때는 선명하게 싸우되 유연한 노조를 만들어 젊은 조합원들을 동참시키겠다는 복안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 노조와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필요하면 연대도 하겠다고 말했다. “노조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잘 알아요. 현 노조를 비판하거나 현 노조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새 노조의 활동이 KBS가 공영방송의 길을 가는 데 밀알이 된다면 많은 조합원들이 동참하리라 확신해요.” KBS본부(준)는 현 노조를 탈퇴한 600여 명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노조 가입을 독려하고 이달 말까지 노조원 1천명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4년 12월 KBS에 입사해 국제부, 사회부, 정치부 등을 거친 그는 ‘뉴스타임’ 앵커를 지낸 중견기자다. 지난해 11월 12대 노조 정·부위원장 선거에서 노조위원장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고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받아들였다. “8월 사태 이후 선배와 동료들이 고초를 당하는 걸 보면서 죄책감이 컸어요. 노조위원장 권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이유가 됐죠.” 노조위원장 출마를 극구 말렸던 아내는 선뜻 동의했다. 친구, 선후배들의 격려 문자나 응원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없는 길을 만들어야 하기에 막막해요. 처음 가는 길이기에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어떤 길이 놓여 있는지 모르죠. 가다보면 길이 만들어지고,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르지 않겠어요. 공영방송의 정신이 살아있는 공간이 활성화되면 KBS는 변화하고,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