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10항쟁 취재기자들에게 듣는다
촛불문화제, 6·10민주항쟁이 근원 ... 언론보도, 인터넷 언론에 뒤져 '반성'
민왕기 기자 wanki@journalist.or.kr | 입력
2008.06.11 00:35:30
편집자주 : 1987년 6·10 민주항쟁은 언론 보도가 그 기폭제였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을 보도하면서 민심은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현장을 뛰던 젊은 기자들은 이제 중견기자가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했던 중앙일보 신성호 수석논설위원(당시 사회부 기자), 태극기 앞에서 절규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역사의 명장면 으로 남긴 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장(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 사회부 기자로 항쟁의 현장을 지켰던 오태규 한겨레신문 수석부국장(당시 한국일보 기자)과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당시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21년이 지난 2008년 6월의 촛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9일 ‘6·10항쟁과 촛불, 그리고 언론’이라는 주제로 본보 주최 특별좌담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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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13층에 위치한 한국기자협회 회의실에서 ‘6·10항쟁과 촛불, 그리고 언론’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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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
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 국장)
신성호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오태규 (한겨레신문 수석부국장)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
◆ 사회
본보 김신용 편집국장
/ 김신용 편집국장 (이하 사회자) / 6·10항쟁 21주년을 맞아 ‘6·10민주항쟁과 촛불, 그리고 언론’이라는 주제로 특별좌담회를 개최하게 됐다. 87년 당시 선배들의 취재가 없었더라면 항쟁도 그렇게 번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언론의 역할은 컸다. 1987년 민주항쟁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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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규 한겨레신문 수석 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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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규 / 는 그때 2년차 기자였다. 생각해보면, 최루탄 가스와 눈물, 그리고 돌…. 그런 것들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살벌했다. 목숨 걸고 나가는 그런 시위였다. 군화발에 밟히든 뼈가 부러지든 잡혀가지 않는 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전화 걸고, 최루탄 터지면 콜록거리며 전화로 부르던 기억도 난다.
신문사 안에서도 싸워야 했다. 당시엔 시위대가 몇 명이 나오느냐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는데 편집국 안에서는 가급적이면 숫자를 적게 쓰려고 했다. 사회부 기자들은 부르는 대로 안 나가는 게 불만이었다. 결국에는 젊은 사회부기자들이 부장에게 항의했다. 한번 나가보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적게 쓰면 어떻게 하느냐. 사회부장과 함께 차를 타고 도심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 후로 데스크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 고명진 / 사진기자들은 방독면, 헬멧 안 쓰면 취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신기자들이 종군기자 수당을 받으며 취재를 할 정도였다. 말 그대로 전장과 같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경찰과도 싸워야 했다. 왜냐면 기자가 취재하고 사진을 찍으면 시민들이 덜 폭행을 당하게 되니까. 이번 촛불문화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사진을 굉장히 두려워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사진이나 카메라 취재를 방해하는 경찰 소대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 사회자 / 당시 민주화 항쟁과 관련해서 신성호 위원께 묻고 싶다. 6·10 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21 주년이 된 지금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 신성호 / 당시 내가 던진 1보는 경찰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하나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제목 자체로도 쇼킹한 것이다. 어느 데스크라도 흥분했을 것이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굉장히 놀랐다. 그때부터 취재 비상이 걸리고 동시에 특종을 해야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은밀하게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지시도 있었다. 사회부장이 전화를 해와 “너 자신 있느냐. 이거 잘못되면 너랑 나랑 국장이랑 사장이랑 줄줄이 큰일 난다”고 하더라. “자신있다. 맡겨달라”고 했다. 특종은 그렇게 나왔다. 하지만 돌아보면 6월 항쟁과 정권의 항복문서라 할 수 있는 6·29선언으로 민주화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 비민주적 요소들이 사회 곳곳에 아직 남아있다.
/ 사회자/ 촛불문화제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6·10항쟁과 비교해서 말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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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 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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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진 / 6월 항쟁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87년 6월 항쟁이 이념적이었다면 이번 촛불 시위는 먹거리 문제라는 생활 속의 이슈가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참여 구성원도 확연히 다르다. 87년엔 학생, 노동자를 규합하는 중심세력이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그런 세력 같은 것은 없다. 참여 구성원들도 과거와 상당히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결국 이렇게 다양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쌍방향 미디어의 힘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로 조·중·동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불만이 많았던 것은 발달된 인터넷 환경 탓에 시민들도 실시간 생방송으로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오태규 / 이번 촛불문화제가 생활 이슈로 촉발됐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한편으론 6·10 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이 그 근원에 있었다고 본다. 민주화라는 큰 고비를 넘기면서 관심영역이 생활이나 문화로 확장되었고 결국 인터넷환경과 결합되면서 확대됐다고 본다. 그래서 87년 민주항쟁과 지금의 촛불문화제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발전적으로 진행돼 온 것이라 생각한다.
/ 신성호 / 최근 촛불문화제를 일부에서 6월 항쟁과 비교하는데, 성격이 다르다고 본다. 6월은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의 촛불문화제는 쉽게 압축하면 먹거리 문제라서 성격이 조금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같을지 몰라도 지향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과거 시민들이 정치적인 이슈로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면 이제는 자기 개인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서 과감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투쟁보다는 가족단위로 나와 어울리고 토론도 하고 자기 견해를 밝힌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초기의 순수한 촛불문화제가 후반기로 갈수록 정치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단체들이 개입, 편승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이대근 / 나는 지금이 87년 체제가 종언을 고하는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20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과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절박한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심화되는 과정이 바로 지금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걸 뛰어넘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 이제 삶의 질, 생활의 질, 행복 추구권을 국가가 얼마나 뒷받침 해주느냐, 그것이 관심사다. 그리고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면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한다. 87년 이후 신자유주의 민주화의 한계가 드디어 20년 만에 충돌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 사회 / 촛불문화제와 관련한 언론보도가 천차만별이다. 보수신문의 ‘배후론’ 등은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인터넷 언론에 의해 웃음거리가 됐다. 기성언론이 자성해야 할 점 등을 말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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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호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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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호 / 사실 나는 좀 우려하는 입장이다. 최근 언론보도 양태를 보면 언론의 내전이라고 할까, 내분이 일고 있다. 언론이 언론을 공격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지 않나. 언론이 모두 똑같은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는 없다. 언론에 따라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끼리 공격하고 비난한다. 이것은 언론발전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명백히 잘못한 것은 지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를 손가락질 하며 전쟁하는 기분이 든다.
/ 사회자 / 기성 언론, 제도권 언론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나.
/ 신성호 / 글쎄. 잘 한다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독자·시민들의 목소리 여과 없이 전하는 게 언론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실 초기에 촛불집회를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로 과소평가한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참석자도 많아졌고 일부의 목소리는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초기와 다르게 보수매체의 논조도 바뀌지 않았나. 처음에는 (보수언론이) 촛불문화제를 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 이대근 / 촛불문화제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면서 한국언론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볼 수 있었다. 20년 전엔 언론 통제를 뚫고 보도를 했다. 언론사 내부에서도 기자들이 시국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론의 민주화 역할을 인식하게 되고 기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언론이 제 색깔을 갖고 마음대로 보도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그렇지 못하다.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난 언론은 새로운 자본의 통제, 소유주의 통제 하에 있으면서 언론의 그림자를 분명히 드러냈다. 70~80%의 신문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했나. 지지율이 17%까지 떨어지고 전국민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1백일간 언론은 무엇을 했는가. 정부통제로부터 벗어난 언론이 역할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인터넷 미디어의 발달로 시민들의 여론을 따라가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 오태규 / 언론환경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6·10항쟁 때만 하더라도 방송은 관변이었으니 큰 역할을 못했고 종이신문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실상 인터넷·개인 저널리즘이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한 계기가 됐다. 과거 기성언론들이 의제를 설정하면 여론이 따라갔다. 하지만 이제는 독자들이 기사를 평가하고 비판한다. 기성언론도 움직여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취재를 할 때 기자들도 다음 아고라와 아프리카 방송 본다. 언론환경은 변화했고 이런 점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도하는데도 장애가 된다고 본다.
/ 고명진 / 처음부터 언론이 촛불문화제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에 잘못이 있었다. 정답은 5월 2일부터 나와 있었다. 현장을 뛰는 기자들은 포털 기사에 달린 악플 같은 인터넷 여론을 너무 간과했다. 더 중요한 것은 데스크들이 현장에 나가 봤느냐는 것이다. 6월 항쟁 당시 시위대들의 비장한 분위기와 지금의 현장 분위기는 다르다. 분위기를 확인했더라면 유모차까지 끌고나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것을 아우르는 데스크들이 현장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는 중요하다.
/ 사회 / 이명박 정부가 성난 ‘촛불 민심’ 달랠 해법은 뭐라고 보나
/ 오태규 /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말을 안 듣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는 게 시민들의 불만이다. 대통령이 국민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봐서는 절대 그런 자세가 안 돼있다. 진중권 교수 말대로 시민들은 탈근대, 정부 대책은 전근대다. 언론도 그 범주에 있을지 모른다. 이 대통령은 자기의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과거 효순·미선양의 죽음, 탄핵정국에서도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대선, 총선, 탄핵재판 등 시민들의 요구를 바로 해소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이렇게 배출구가 막힌 상황에서 대통령마저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촛불정국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많다.
/ 신성호 / 미국산 쇠고기 문제, 인사파행, 무리한 대운하 추진 등 복합적인 문제가 꼬여있는 형국이다. 엊그제 보도에 나온 시위 참석자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협상과정에서 분명히 실수가 있었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사과를 해라.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문제는 진정성이다. 정말 정부가 잘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 진정성 있게 말하면 여기 참석자들 절반은 돌아갈 것”이란 얘기였다. 그런 게 부족하다. 정부 스스로 겸손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놓고 정말 국민 앞에 겸손했나. 소통도 없었다. 그런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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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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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근 / 한국사회가 합의한 해법은 있는데, 권력을 잡고있는 대통령이 그 해법대로 하지 않을 것이란 게 문제다. 결과적으로 비관적이다. 정부의 대응책이란 게 인적쇄신이다. 수석 좀 바꾸고 내각 좀 교체하고…. 그것 가지고 풀릴 가능성은 없다. 시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국정 방안 전반을 재수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운하는 포기한다는 얘기도 없었고 낙하산 인사 계속되고 있다. 민영화도 일방적으로 추진한다. 촛불시위가 한 달이 넘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하나도 없다. 인사 가지고는 풀릴 수 없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그 10년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해야 한다. 10년간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야 한다. 시민사회는 변했고 욕구는 다원화됐다. 그런데 정부는 20년 전 그대로다. 대통령 70~80년대 리더십을 가지고 21세기 다원화된 시민들을 이끌 수 있겠나.
/ 고명진 / 이명박 정부가 풀어가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51%의 철학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충돌, 이념적 갈등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다만 그 갈등 속에서도 51%의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되고 있는가. 유가 상승과 곡물값 급등으로 주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한국 중소제조업도 붕괴될 조짐이다. 국회도 이런 심각성을 읽고 빠른 시간 안에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 사회 / 87년 6월 항쟁 취재기자로서 2008년 6월 후배 기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 신성호 / 이제 취재 환경이 예전보다 좋아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보니 현장을 소홀히 할 수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것이 기자의 1차적인 직무다. 문제는 현장에 있다고 본다.
/ 이대근 / 현장에 매몰되지 말고 사건들을 자기 나름의 큰 틀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미시적인 사건들을 다룰 때도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사건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 오태규 / 젊은 기자일수록 균형감을 갖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한쪽으로 휩쓸리기가 상당히 쉬운 주제다. 사건기자로서 한쪽으로 휩쓸려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위치에 대한 점검을 해야 한다.
/ 고명진 / 사진기자들은 지금 역사의 현장을 찍고 있다는 걸 명심해 달라. 사진기자는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 촛불문화제에 손을 잡고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 지금은 사소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소중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