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비결은 열심히 뛰고, 열심히 듣는 것"
4년간 TRS사업 51차례 보도한 내일신문 전호성 기자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 입력
2008.06.04 15:38:23
2004년 3월 어느 날. 5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내일신문 전호성 기자를 찾았다. 그는 국내 무선통신업체 관계자로 ‘국가무선 통합망(TRS) 사업’에 대해 제보할 것이 있다고 했다. 청와대에 제기했던 민원이 묵살된 후 유력 언론사를 여러 곳 거쳤던 그, ‘내일신문 전호성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무작정 왔다고 했다.
전 기자와 TRS의 질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 기자는 제보자가 건넨 자료를 검토하면서 커다란 정치적 힘이 개입돼 있음을 직감했다. 무선망 관련 서적을 탐독하면서 업계와 학계 전문가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기존 무선망을 활용하면 재난망 구축이 가능하고, TRS 시스템은 오히려 통화불능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첫 보도는 5월13일 나왔다.
그러나 소방방재청은 부인했다. 그러면서 전국 1천4백40여개 정부기관 무선통신망을 하나로 묶는 TRS 구상을 2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전문가들조차 수조원의 혈세가 낭비된다며 반대하는 사업을 정부가 밀어붙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취재를 하면서 통합망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외국회사와 정부부처의 커넥션이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재난 무선망이 제일 잘 갖춰졌다는 일본을 두 차례 다녀왔다. 통합망 시범사업 구간(서울 과천~안산) 설계도를 입수해 국내 기술자들과 날밤을 세워가며 토론했다. 우리기술로도 재난무선망 구축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즉 3천5백억원을 들여 TRS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국책사업에 이렇게 허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황당했어요. 국가에서 녹봉을 받은 공무원들이 뇌물과 압력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서 암담함을 느꼈죠. 심하게 말하면 한국 공무원들이 외국 통신회사의 영업사원 역할을 한 것이에요.” TRS는 외국회사의 로비에 정부부처가 휘둘리면서 국책사업으로 둔갑한 ‘사기 사업’인 셈이었다.
2004년 3월부터 올 4월까지 TRS 보도 횟수만 51차례. 4년간의 끈질긴 추적 보도는 결국 감사원의 감사를 이끌어냈고, 감사원은 올 3월 ‘특정회사 독점과 예산과다 투입 등 문제가 있어 통합망 사업을 그대로 추진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으로 판단됐다’는 결과와 함께 관련자들을 징계조치하라며 해당 기관에 통보했다.
“자기 양심에 반하는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적잖아요. 알면서 못 본 체하고, 광고로 엿 바꿔먹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무기력해지고…. 후배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어요. 어렵더라도 버티고 싸워라. 그러면 기자생활 할만하다.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지요. 더러 지치기도 하고, 회유도 있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대학졸업 후 10년간 노동운동을 하다 1993년 주간내일신문이 창간하면서 뒤늦게 기자를 하게 됐다. 93년 서해 위도 페리호 침몰 사건 당시 ‘백운두 선장은 죽었다’는 기사를 써 창간 3주된 내일신문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린 당사자이다. 좋은 기사를 쓰는 비결을 묻자 “현장을 발로 뛰고 열심히 사람 얘기를 듣는 것”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