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지났어도 공영방송 독립성은 여전히 숙제"

1990년 KBS 4월 투쟁 치른 김만석 데스크


   
 
   
 
4월, 여의도에는 벚꽃이 파스텔로 칠한 듯 눈부시게 번져있었다. 18년 전에도 그랬다. ‘방송민주화’의 외침에 부서지는 벚꽃 잎을 타고 ‘닭장차’로 끌려갔던 방송 노동자들. 그 중에는 서른한살, 피 끓는 초년병 기자였던 KBS 김만석 데스크(취재파일4321팀)의 모습도 있었다. 관제 사장 임명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다 밀어닥친 공권력에 영어의 몸이 됐던 그날은 이제 아득한 이야기가 됐다.

“저보다 훨씬 고생하신 분들이 많은데….”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던 그는 자리에 앉자 1990년 ‘KBS 4월 투쟁’의 편린을 꺼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비교적 노동조합과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며 회사를 운영했던 서영훈 사장을 사실상 퇴진시키고 서기원 사장을 임명했다. 조합원들은 ‘비상대책위’를 발족시키고 신임 사장의 출근을 저지하며 본관 로비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4월12일. 전경과 백골단 3백여명의 공권력이 투입된 순간 ‘방송민주화’는 창살 속에 갇혔다. 구속된 조합원 명단 중 기자는 세 명. 청년기자 김만석의 이름도 있었다.

“제가 입사했을 때만 해도 보도국장 옆에 안기부와 보안사 요원들이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있었습니다. KBS는 어용방송이라며 취재거부를 당하기도 했던 때입니다. 젊은 기자들은 더이상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8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언론사에도 속속 노조가 들어섰다. KBS는 정권과 민주화 세력 간에 피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공권력이 투입되자 불씨는 전체 언론계로 번졌다. MBC와 CBS 노조는 동맹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단한 시간이었다. 구속 1백일 만에 구치소에서 나왔지만 원직 복직까지는 3년이 걸렸다. 홀어머니를 모신 외아들이었던 그로서는 견디기 쉽지 않았다. 그는 “파업투쟁하다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던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에 비하면 말을 꺼내기도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18년이 지나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보도국의 정보요원들도 자취를 감췄고, 어용방송이란 오명도 없어졌다. 민주주의는 보통명사가 됐다. 그러나 김 데스크는 씁쓸하다. 정권의 입맛대로 KBS 사장을 앉히겠다는 구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권이 바뀌면 KBS는 전리품이 돼버린다”며 “아직도 공영방송의 독립성 문제는 1990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균형 잡힌 시각 아래 스스로 상식과 도덕률에 비추어 떳떳하다면 할 말을 하는 게 기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후배들에게도 그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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