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을 꿈꾸는 지천명, 미소가 머문다"

'부모로 산다는 것' 펴낸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


   
 
  ▲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  
 
“최고의 기자는 최악의 부모”라는 넋두리가 있다. 하루하루 긴박하게 살아야 하는 기자가, 가족에게도 ‘유능’하기란 쉽지 않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오동명씨도 그랬을까. 최근 ‘부모로 산다는 것’(두리미디어)이라는 책을 냈다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앉자마자 김승연 회장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승연 회장 사건에서 모든 부모가 자유로울 수 있나요? 돈 있고 능력 있으면 그처럼 하지 말란 법 없을 겁니다.” 자기 자식만 최고라는 삐뚤어진 사랑이 지배하는 한, 조건만 되면 제2, 제3의 김승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화가 자성하고, 진정한 자식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로 삼자는 의미에서 그룹에 책을 보내고 정식 제의할까도 생각했지만 “상업적으로 오해할까봐 단념했다”고 한다.

1999년, 홍석현 회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자보를 사내에 붙이고 정든 순화동을 스스로 떠났던 오동명씨. 그에게는 그동안 변화가 있었던 듯했다. 중앙 퇴사 후 언론개혁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계를 느꼈다. 언론의 문제를 얘기해도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아이들이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우며 자란다면, 사회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이제 그의 모든 영혼은 외동아들 차담이를 향해 열려있었다. 아이는 그에게 힘을 주고, 꿈을 꾸게 하는 원천이었다. 아버지도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꿈을 가지라고 하면서 내가 안 가질 수 있겠어요?”

그의 꿈은 소박하다. 실현 가능한 꿈을 꾼다. 차담이와 자전거 여행을 하는 것, 파리에서 자신의 전시회를 여는 것, 동화책을 내는 것 등이다. 원래 미대를 지망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다. 40대에 화가가 된 고갱보다도 조금 더 늦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파리 몽마르트의 한 아틀리에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구도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노화가의 열정적인 붓놀림은 아이들이 사랑하는 동화가 되어 다시 태어날 것이다. ‘부모로 산다는 것’은 쉰 해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런 성찰의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지난 2월 춘천으로 이사했다. 연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춘천 역시 꿈을 알게 해준 곳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경제학 전공이었던 그는 사진을 알게됐다. 경춘선을 오르내리며 수많은 피사체를 만났다. 결국 그는 사진 기자가 됐다. 춘천에 간 뒤로는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산과 바다가 나오라고 손을 이끈단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보면 저절로 눈이 감겨지고 웃음이 나와요. 왜 이제 왔나 싶어요.”

좋은 직장, 높은 수입.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남는 장사를 한 것 같다. 쉰 살이라고 믿을 수 없는 그의 꿈과 열정이, 그리고 행복한 미소가 모든 것을 대답해주고 있었다.
장우성 기자 jean@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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