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죄는 天刑…보도 신중해야"

'노동당 입당·간첩행위' 누명 호소 박창희 교수


   
   
성인들에게는 아직도 ‘초등학교’보다 ‘국민학교’가 더 익숙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게 북한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일본 오사카경제법과대학 박창희 아세아연구소 객원연구원(74세·사건 당시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 은 1990년대,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바꿀 것을 주장해왔다. 이는 1996년 정부에 의해 실현됐다. 그러나 박 교수는 그 숙원이 이뤄지기 한 해 전, 북한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간첩으로 몰려 옥고까지 치렀다. 공소 내용에는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자는 운동을 벌였다”는 것도 포함됐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95년 4월, 박창희 교수가 북한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일본의 북한 공작원의 지시를 받으며 간첩 행위를 했다고 발표했다. 그가 벌인 초등학교 이름고치기 운동 건도 간첩 활동의 하나로 소개됐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물론 공소 제기 전이었다.

그러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은 기소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초등학교 명칭 변경 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은 계속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상 회합 통신죄 위반을 적용해 징역 3년6개월을 확정했다.

박창희 교수는 1991년 6.25 때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평소 안면이 있던 재일교포 사학자 신모씨에게 생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신씨는 조총련과 민단 양쪽에 넓은 인간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살아있었다. 한 차례의 편지 교환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자신이 간첩으로 몰리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안기부 남산분실에서 20일 동안 조사받으면서 갖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여기에 언론은 기름을 부었다. 당시 언론은 안기부의 간첩사건 발표 그대로 보도했다. 박 교수는 “당시 언론이 수사당국의 말만 믿지 않고 신중하고 정확하게 보도해줬다면 더욱 객관적인 재판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 중에도 ‘국민 여론’이 주요한 논거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언론이 처음부터 자신을 간첩으로 확정 보도한 것이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재판부가 북한공작원이라고 인정한 재일동포 서모씨도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 때문에 누명을 쓴 것 같아 미안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박 교수의 가족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9개 언론사에 정정보도 신청을 냈으나 반론보도문을 싣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는 “조선노동당 입당 건, 초등학교 이름 고치기 운동 등 재판 과정에서 근거없다고 드러난 사실 조차 추후 보도한 언론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 뒤 박 교수는 학교에서 해임됐다. 시간 강사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인간관계의 파괴였다. 가까웠던 친구와 동료들조차 그를 점점 멀리했다. 그는 “사건 전에 바다에서 살았다면 사건 뒤엔 우물에서 살았다”며 상처를 되짚었다.

박창희 교수는 최근 불거진 ‘일심회’ 사건도 남의 일 같지 않은 듯 했다. “간첩죄는 대한민국에서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습니다. 한 인간을 완전히 매장시켜버릴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보도를 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판도 하기 전부터 언론이 어떻게 단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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