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의 恨 풀어줘야"

지광스님, 신군부 칼날에 강제해직…불교 귀의




  지광 스님  
 
  ▲ 지광 스님  
 
‘해원상생’(解怨相生).

해직기자 출신 지광스님(능인선원 주지)이 세상에 던진 화두다. “원한을 풀어줘야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언론탄압 진상규명 특별법을 계기로 강제 해직 언론인 문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부처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는 그는 법당을 감싸는 향냄새처럼 부드럽지만 강렬하게 특별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지광스님은 민주화 이후 각 분야의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많이 이뤄졌는데도 유독 해직 언론인들만이 방치되고 있다며 이번만큼은 반드시 관련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권의 부당한 탄압으로 꽃다운 청춘을 잃고, 육체적으로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가정 파탄의 비극까지 맛봐야 했던 수많은 언론인들. 이제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주지 스님’이 됐지만 ‘동지’들의 아픔은 그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 자꾸 하면 뭘 해.” 1980년 신군부 등장 당시 한국기자협회 한국일보 분회장이었던 지광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살을 에는 기억의 파편을 하나씩 맞춰나갔다.



당시 기자들은 원고를 쓰면 맨 먼저 어디를 가야했을까. 바로 서울시청 2층이었다. 군에서 나온 검열관에게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청년 기자 지광’은 보다 못해 맞고함 치며 싸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총칼의 힘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항쟁의 광장에도 서있었다. 5월17일, 취재를 위해 광주에 들어간 그는 군부의 폭력과 살육의 현장을 목격했다. 요즘도 광주에 가면 망월동을 꼭 들른다는 지광스님에게 그날의 기억은 26년이 지난 오늘도 충격 그 자체인 듯 했다.



그해 여름부터 신군부가 언론에 본격적으로 칼날을 들이대면서 해직과 함께 오랜 수배생활이 시작됐다. 끔찍한 연행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기를 여러 차례. 사랑하는 아내와 네 살배기 아들은 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지리산 깊은 곳에까지 몰린 그를 받아준 곳은 사찰뿐이었다. 홀로 산 중에서 고래고래 울부짖고 분노를 토해봤지만 마음속의 상처는 커져만 갔다. 그런 그에게 참선과 부처의 가르침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불의에 항거했던 기자 정신을 밑거름 삼아 “자아 속의 부조리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전화위복이랄까. 지금은 25만 신도를 거느린,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사찰의 주지로서 한국 불교의 대중화와 개혁을 이끄는 중심인물이 됐다.



지광스님은 해직언론인 출신의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오늘이 있게 한 역사와 동료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특별법 제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선배로서” 후배 언론인들에게도 당부했다.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내몰린 수많은 언론인들이 응분의 보상을 받도록 해줘야 합니다. 지난 일을 자꾸 들춰서 뭐하냐고들 하지요. 하지만 차를 앞으로 운전하려면 뒤도 봐야 합니다. 맺힌 한을 풀어주지 않고 무조건 잊고 미래만 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지난 아픔을 달래준 뒤에 화해도 가능한 것입니다. ‘해원상생’이라는 부처님 말씀을 곱씹어 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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