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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홍 전 기자협회장, 국회의원(열린우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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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0년 5월 20일, 군부독재와 언론검열에 반대하며 언론자유를 온몸으로 저항한 선배 기자들을 이끌었던 당시 한국기자협회는 투쟁의 선두에 서있었다.
당시 제20대 한국기자협회를 이끌었던 김태홍(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회장은 언론검열에 맞서 ‘보도지침 파문’을 주도하다 갖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동료 기자들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며 오늘날의 ‘언론의 자유’를 가져오게 한 끊임없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기자협회장이던 김태홍 의원의 ‘기자의 날’의 제정의미는 남다를 거라 생각된다. 이날을 ‘기자의 날’로 제정한데 따른 감회를 말해 달라.
저는 80년 5월 20일을 기려서 ‘기자의 날’로 정했다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제가 직접 개입돼있던 기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을 미화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
하지만 80년 4월 1일 한국기자협회 제 20대 회장에 취임을 해서 ‘5·18 사태’가 발생하기까지 한 달 보름여 동안 기자협회를 운영했는데 그 기간이 한국 언론사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좋은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자의 날’로 제정된 5월 20일은 80년 당시 전국의 신문, 방송, 통신 등 기자협회 회원사 대의원들이 모두 모여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체제에서 강요된 검열철폐를 20일까지 하지 않으면 자정을 기해 전국의 언론종사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한 기념비 적인 날도 된다.
‘기자의 날’은 기자들의 생일이다. 생일은 유의미하고 뜻 깊게 보내라고 만들어진 날이기도 하다.
‘진실보도’와 ‘공정보도’를 위해서 전국의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총파업을 계엄치하에서 선언을 했듯 그 용기와 올바른 삶의 자세를 본받는 날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시 기자협회장이던 김 의원께서는 독재정권으로부터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한 피해자라 들었다. 당시 한국기자협회 주도로 언론검열철폐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는데 당시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75년부터 80년까지 일부 언론사에서는 언론자유를 위한 비공개모임을 해오던 사례가 종종 있었다. 당시 합동통신과 중앙매스컴,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이 4개사 기자들이 비공개 언론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79년 ‘10·26사태’가 불거지면서 이들 4개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공개운동을 하기로 합의를 봤다. 다음해인 80년 3월말 집행부 선거가 있는 ‘한국기자협회’를 ‘우리세력’이 점령하자고 의견을 맞춘 것이다. 그 결과로 80년 4월 1일 새로운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했다.
한국기자협회장으로 당선돼 협회에 출근하기 이전인 4월 1일까지 기자협회 회장 방에는 7명의 기관원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오전 10시가 되면 당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서 각 2명씩, 치안본부 정보과에서 1명,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에서 1명, 남대문경찰서 정보과에서 1명 등 모두 7명이 한국기자협회에 자기 집 드나들듯 출근을 했다.
기자협회 회장 방은 그들이 주인이고 회장은 손님인 상황이 빚어졌다. 4월 1일 출근을 해서 기자협회 문 밖에다 ‘기관원 출입금지’를 써 붙였다. 마치 그 형국은 엄청난 힘을 가진 운동선수가 초등학생이 써 붙인 ‘출입금지’ 표지를 보고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당시는 기자협회가 지금의 프레스센터 위치 4층 목조건물이었다.
또 서울시청 2층에서 군인들이 매일 언론검열을 하고 있었다. 꼭 보도돼야 될 기사는 반드시 빠지고 하잘 것 없는 기사를 키우는 그러한 신문과 방송 검열이었다.
기자협회장에 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취임 첫 날 당시 돈으로 18만원을 주고 영국제 수동 인쇄기 중고기계를 사들인 것이었다. 매일 서너 건의 성명서 형식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찍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AP를 비롯한 전 외신에 타전, 당시 전두환 정권 치하의 한국의 중요한 사건들이 실시간으로 외신을 타게 됐다.
이런 탓에 전두환 정권의 공적(公敵) 제 1호가 바로 한국기자협회 회장이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은 지하층에 있는 레스토랑을 전세를 내 송건호 선생, 이영희 선생, 천관우 선생, 동아투위, 조선투위 회원들, 현역 언론인 등 뜻을 같이 분들과 함께 ‘기자의 밤’을 가졌다.
오늘날 회원사들의 단결과 화합을 촉구하는 한국기자협회의 최대 행사 중 하나인 기자협회 친선축구대회 등 투쟁을 알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축구행사를 열던 상황과 분위기는 어떠했는지.
당시 5월 1일부터 10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국 기자협회 축구시합이 열렸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선수들이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기자를 대신해 출전을 했고 지금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MBC선수로 출전을 해 골문 앞에서 점프를 했다 땅에 떨어져서 혼절을 해 병원에 실려 가는 그런 사건도 있었다.
당시 선수들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서 청팀은 푸른색 머리띠에 ‘검열철폐’를 써 붙이고 백팀은 흰색 머리띠에 ‘계엄철폐’를 써 붙여서 열심히 의의를 알리기도 했다.
그 때는 시시각각 계엄당국과 기자협회의 전면적인 충돌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긴장된 세월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축구대회는 그만큼 큰 의미를 지녔다 하겠다.
그러한 속에서 80년 5월 15일 전국언론사의 대의원들이 집회를 갖고 20일 밤 0시를 기해서 검열 철폐가 관철되지 않으면 총 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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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홍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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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의원께서는 오랜 시간동안 탄압을 피해 다닌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지.
5월 17일 자정을 기해 확대계엄 조치가 내려졌는데 그 날 오후에 확대계엄이 실시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언론탄압뿐만 아니라 정부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어떤 탄압이 진행될지 모르는 긴장감 있는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에 예감은 갖고 있었지만 막상 일이 터지니 갈 곳이 막연했다.
친구, 후배 집들을 전전하고 특별히 오랜 기간 동안 숨겨준 그런 좋은 분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배령은 다른 때의 수배령과 달라 사람목숨을 ‘개 값’으로 취급하던 때였기 때문에 수배 자체도 그 모양새와 강도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1백여일 동안 피해다니다 친구네 목장에서 붙들려서 남영동으로 압송이 됐다. 내 담당은 ‘이근안’씨였다.
보름간을 아침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취조를 받는데 그 취조라는 것이 때리고 물고문하고 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때는 기자협회 사건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결 지으려는 각본을 그들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취조 받을 당시는 김대중 사건이 상당히 진행된 후였기 때문에 조사의 강도가 그렇게 높진 않았다. 그 뒤로 그 해 11월 1심 군사재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5월에 서울 고법에서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기자의 날’ 제정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던 ‘보도지침’ 파문에 관여했는데 당시 상황을 떠올리신다면.
84년 12월 19일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기자 협의회, 출판사협의회, 4개 단체가 연대해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85년 5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인 월간 ‘말’이 창간됐다.
‘말’지 발행인을 역임하면서 취재도 숨어서 하고 제작도, 판매도 숨어서 하는 순간을 맞았다. 모든 원고를 2벌 이상 만들어서 당시 1벌은 딴 곳에 숨겨놓고 1벌은 제작하는데 내놓는 등 항상 ‘일촉즉발’의 순간에 대비했다.
전국의 모든 언론매체들이 재갈이 물려있는 순간, 격월로 발간됐던 ‘말’지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러한 인기 때문에 검열이 더욱 심해져 서점에서는 사회과학서적에 포함된 코너에서 숨겨서 팔기도 했다.
당시 한국일보 김주언(현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 기자는 당시 ‘말’지에 각 언론사에 독재정권으로부터 ‘보도지침’이 지시됐다는 제보를 하게 됐고 86년 이러한 ‘보도지침’ 원고를 편집해 86년 9월 9일 명동성당에서 송건호 선생과 함께 외신기자를 모두 불러 책자로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86년 ‘말’지 9월호에는 당시 한국일보의 김주언 기자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85년 10월부터 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가 각 언론사에 시달한 보도지침 5백84건을 폭로했고, 이 사건으로 발행인이었던 나뿐만 아니라 신홍범 실행의원, 김주언 기자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됐다.
보도지침에서는 ‘가, 불가, 절대불가’ 등의 구분을 통해 각종 사건이나 상황, 사태 등의 보도여부는 물론 보도 방향과 내용,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해 시달함으로써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정부기관이 전담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랐던 언론사는 취재한 기사의 비중이나 보도가치와는 상관없이 신문·잡지를 발행함으로써,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당시 언론을 예의 주시하던 정보부 요원들은 ‘말’지 기자들이 손수 나서 광화문 크라운제과에서 차를 마시며 빼돌렸던 일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말’지에 정부의 언론검열지침을 담은 ‘보도지침’이 폭로된 이후 3개월을 도망다녔고 86년 12월 9일 다시 체포돼 1개월여 간 남영동 형무소에 잡혀들어가 갖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당시 나와 김주언 기자, 신홍범 의원 등 3명의 부인을 불러 ‘가톨릭 언론대상’을 제정해 수여했고 이후 언론의 저명한 상으로 부상되기도 했다.
‘기자의 날’을 맞아 진정한 선배를 찾고 있다. 김 의원께서 생각하는 진정한 ‘기자선배’는 무엇이며 왜 그러한 분이 ‘훌륭한 기자’로서 지칭을 받아야하는지 의견을 말해달라.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선배의 귀감은 당연하게도 ‘사실보도’와 ‘진실보도’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런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투정신’이나 ‘정치권력’, 금전으로부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그런 ‘선비정신’이 요구된다고 본다. 손쉽게 귀감이 되는 선배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아마 현대 사회의 특성 같다. 영웅의 시대가 가고 다수의 훌륭한 사람들이 공존을 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이 중 특출한 어떤 사람을 귀감으로 삼는 다는 것은 시대적인 여건 때문에라도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기자협회에서 ‘훌륭한 선배기자’ 선정을 솜씨 있게 잘 해주기를 바란다.
‘기자의 날’을 앞두고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마라톤 대회뿐만 아니라 출판기념회 등 ‘기자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준비 중인데 혹 이런 행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그 이유는.
해서는 안 될 보도를 선정해서 이를 보도한 언론사에게 ‘추악한 언론 상’을 수여했으면 좋겠다. 왜곡 보도들이 우리 사회와 역사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와 경제발전을 가로 막는 ‘암 덩어리’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보다 더 큰 폐악은 없다고 본다.
맨날 ‘훌륭한’ 것들만 생각하고 살순 없다. ‘기자의 날’은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과 언론자유의 발달사가 괘를 같이 하는 측면이 있다. ‘3·1절’이 있고 ‘6·25’나 ‘8·15’가 있는데 그러한 기념일을 제정하는 것은 놀러가라고 제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뜻을 기리라고 제정한 것이다. ‘기자의 날’에는 전국의 기자들이 잠시만이라도 언론자유 투쟁을 위해서 헌신했던 선배기자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하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희망사항이 있다면 3백m트랙을 세 바퀴정도 도는 중·단거리 육상경주도 있으면 좋겠다. 장거리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참가하고 싶어도 쉽게 참가하겠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