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으로 하는 심의

[언론 다시보기]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소장

내가 정보공개심의위원을 맡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서 얼마 전 심의 요청이 왔다. 이번에도 서면심의였다. 이미 몇 번이나 대면심의로 열어달라고 요청했던 터였다. 위원들이 다른 지역을 오가는 것이 부담스러워 서면으로 하는 것이라면 화상회의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또 서면심의다. 이번에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의신청 경위와 담당 부서의 비공개의견서는 있었지만, 정작 청구인이 공개해 달라고 한 그 자료가 빠져 있었던 것. 심의를 위해 자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서에서 줄 수 없다고 했다. 물건을 봐야 공개할지 말지를 판단할 것 아닌가. 내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채 비공개하겠다는 부서의 의견서만 읽고 판단하라는 것은 상상력으로 심의하라거나 기관의 의견에 힘을 실어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심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정보가 기관의 비공개의견서이기 때문이다. 몇 차례 통화에서도 필요한 자료를 확인하지 못한 나는 정보는 공개가 원칙이라는 정보공개제도의 취지에 따라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안건은 비공개로 최종 결정됐다.

정보공개심의위원이 되면 보통 비밀준수 서약서를 쓴다. 위원회의 특성상 기관이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정보를 직접 들여다보고 공개 여부를 다시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사례처럼 심의가 서면으로 이뤄지는 구조에서 이 서약은 더 무겁다. 민감한 자료가 복제와 배포가 쉬운 이메일과 전자파일로 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원 입장에서도 대면심의가 마음 편하다. 대면회의는 끝나고 자료를 그 자리에 두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서면심의는 심의를 마친 뒤 들여다본 기록과 메일을 건건이 지워야 하니까. 기관도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래서 안건 자료 자체를 아예 주지 않는 것일까.


나는 심의위원보다 청구인을 더 많이 해봤다. 정보공개 청구를 수없이 했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비공개를 받아 이의신청도 숱하게 했다. 이의신청서를 쓰면서 내가 상상한 것은 위원들이 함께 모여 내가 청구한 자료를 펼쳐놓고 기관의 상황과 정보의 특성과 이전의 판례들을 살피며 이건 정말 못 보여줄 것인지 따져보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 상상과 거리가 멀다. 지난해 정보공개센터가 59개 중앙행정기관의 정보공개심의회를 살펴보니 확인된 것만 해도 26개 기관이 서면으로만 심의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심의의견서에는 ‘동의’ 두 글자만 적혀있거나 아예 비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대다수의 서면심의는 각자 의견을 적어 내면 다수 의견이 결론이 되고 위원은 결과만 전달받는다. 누가 나와 다른 판단을 했는지, 어느 지점을 다르게 읽었는지, 내가 놓친 쟁점이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심의란 서로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성립하는 일이다. 그 가능성이 닫히면 위원회는 합의체가 아니라 설문 응답자들의 집합이 된다.


정보공개심의회는 기관 내부의 비공개 판단을 다시 따져보라고 만든 기구다. 그동안 민간의 시각과 전문성이 반영되도록 외부위원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도 변해 왔다. 그런데 논의할 자리가 없고, 볼 자료가 없고, 의견을 적을 칸이 OX를 치는 정도에 그친다면 외부위원을 아무리 늘려도 달라질 것이 없다. 법은 시민의 자리를 늘렸는데 관행은 그 자리를 거수기석으로 만들었다.


7월 김해원 부산대 교수가 자신이 정보공개심의위원으로 있는 부산 연제구의 부구청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소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찬반만 표시하는 서면심의가 위원의 심의권과 청구인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하자 돌아온 것은 시정이 아니라 조례 개정이었다고 한다. 마음을 내어 위원으로 참여했던 기관을 상대로 고소까지 하게 된 심정이 오죽했을까.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소장.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심의회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대면회의만 열어도 상당 부분은 풀릴 일인데, 왜 이렇게 하고 있나. 대면회의를 열고 회의록까지 투명하게 공개한 기관들도 분명히 있다. 모이기 어려우면 화상회의로 하면 된다. 모여서 얼굴 맞대고 논의하는데, 입 꾹 닫고 OX표나 들고 있을 위원은 없다. 대면회의는 논의의 질도, 위원의 전문성도, 절차적 정당성도 모두 확보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상상하려고 정보공개심의위원을 하지 않았다. 검토하려고 심의위원이 되었다. 기관이 비공개한 자료를 직접 보며 그 판단이 타당한지 따지고, 나와 다르게 읽은 위원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이 틀렸다면 그 자리에서 바꾸고 싶다. 그것이 심의다. 정보공개법을 바꿔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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