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재난과 '고통의 연대'

[이슈 인사이드 | 국제·외교]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산산이 부서진 건물 잔해 사이로 가느다란 손 하나가 뻗어 나온다. 살아 있다는 신호이자 포기하지 않았다는 침묵의 외침이다. 도저히 생존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또 절망 속에서도 기적 같은 구조는 이뤄진다. 통상적인 ‘골든타임 72시간’을 훌쩍 넘긴 7일째, 8일째에도 드라마 같은 생환 소식이 들려오는 이유다. 가족들이 연락이 끊긴 자식들의 사진을 돌무더기에 올려둔 채 맨손으로 거친 잔해를 파헤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희망이 없다면 버틸 수 없다.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끝내 빛을 본 이들은 한결같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텨낸 이들이었다.

6월30일(이하 현지 시각) 베네수엘라 라과이라에서 구조대가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수습한 희생자 시신을 옮기고 있다. 6월24일 발생한 연쇄지진으로 3일 기준 사망자가 2600명을 넘었으며, 실종자는 5만여명으로 추정된다. /AP 뉴시스

베네수엘라를 덮친 강진은 지구촌이 월드컵의 열기로 한창 달아오를 때 발생했다. 39초 간격으로 일어난 규모 7.2와 7.5의 연쇄 강진. 진앙이 지표면에서 가까워 순식간에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가뜩이나 내진 설계 없이 돌로 쌓아 올렸던 집들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하필 저녁 시간, 옹기종기 TV 앞에 모여있던 일가족들은 방과 거실이 폭삭 주저 내려앉는 절망적인 상황을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베네수엘라와 북중미 월드컵 개최국 가운데 하나인 멕시코와는 3570km 떨어져 있다. 과달라하라에서 스페인과 우루과이는 월드컵 조별 마지막 경기 직전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잠시나마 경기장의 열기와 환호를 뒤로하고 보여준 인류애의 발현이었다. 이 같은 상징적 연대는 위로의 크기를 떠나 고통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이 된다. 다행히 세계 각국의 구호 손길도 이어지고 있다. 26개 나라에서 2500명에 달하는 전문 구조요원들을 파견했고 종교단체의 성금 모금도 시작됐다.


먼로주의를 언급하며 북중미와 남미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미국 역시 전방위적인 구호 작전에 나섰다. 3억 달러의 긴급 구호금을 편성하고, 미 남부사령부(SOUTHCOM) 주도로 2000명의 병력이 투입됐다. 이들은 지진으로 마비된 항구를 복구하며 선박에서 구호물자를 내리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물자 수송과 긴급 자금 집행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베네수엘라 정부에 가했던 국외 거래 제한 조치를 일부 완화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새해 벽두 군사작전을 통해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전격 체포해 압송하고, 베네수엘라의 원유 사업까지 개입하겠다고 한 마당에 이 대형 재난을 외면했다면 주민들의 대미 적대감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지도력과 영향력 역시 치명상을 입었을 게 뻔하다. 미국이 초기대응에 비교적 발 빠르게 나선 배경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전례 없는 인도적 재난 상황임에도 수많은 나라가 베네수엘라에 섣불리 금융지원을 했다가 미국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몸을 사리고 있다. 강진으로 도로 교통망 곳곳이 내려앉아 이를 복구하면서 물자를 날라야 하는 참담한 현실이지만 과연 국제사회 지원 물길이 원활하게 트일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절망의 심연에서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릴 때, 그 손을 기꺼이 맞잡아주는 것은 국제사회 책임 있는 일원들의 당연한 책무다. 대형 재난에 맞서 인류가 ‘고통의 연대’로 함께 비극을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만 확고히 공유할 수 있다면, 유례없는 재난으로 삶의 뿌리가 뽑힌 이들도 내일을 살아갈 힘과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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