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치

[언론 다시보기] 이상원 뉴스민 편집국장

“고속도로가 반드시 여러분들 마을 앞을 지나가지 않는다 해도, 이 도로가 지나가는 연변에는 많은 연관 효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도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만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경제가 나날이 빠른 속도로 성장 되어가고 있는데,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반드시 공장을 많이 짓고 생산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 모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1968년 9월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여론을 향해 한 말이다. 그때도 개발의 수혜가 직접 우리 마을에 닿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나 보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연설에서 ‘여러분 마을 앞을 지나지 않아도, 국민이 혜택을 볼 수 있다’고 강변한 걸 보면 말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6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호남권 반도체 대규모 팹 투자 발표 대응 당선인 국회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결과적으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피해를 걷어내고 단시간에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보수 정치권에선 국가의 개발 정책이 특정 지역만을 잘 먹고 잘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하며 박 전 대통령의 중요 업적 중 하나로 꼽는다.


약 60년이 흘러서,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비견하는 인공지능(AI) 신산업 육성을 위한 메가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그리고 6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 대통령의 입에서 반복됐다. 2일 이재명 대통령이 충남 아산시에서 열린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한 말이다.


“지역마다 지방자치를 시행하다 보니 단체장들이 주민들로부터 ‘왜 우리 동네는 안 되는 거야’라는 지적을 받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분열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건 국가적으로 국가가 살아남기 위해서 또 지속적이고 포용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반도체는 국가전략산업이다. 어디에 공장을 세우고 전력과 용수, 인재와 공급망을 어떻게 연결할지는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문제다. 그런데 정치권은 이 거대한 산업정책 앞에서도 가장 먼저 지역주의를 꺼내 들었다.


정부가 호남권 중심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대구·경북 정치권부터 즉각 반발했다. 추경호 대구시장은 “대구·경북은 수도권 이남 최대 규모의 반도체 인력 양성 기반과 연구개발 역량, 안정적 전력과 용수, 대규모 산업용지까지 갖춘 비수도권 최적의 입지”라며 “검토 대상에서조차 배제됐다면 명백한 지역 차별이자 국가 산업정책의 합리성을 뒤흔드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대구·경북이 국가 반도체 전략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 묻는 건 필요한 일이다. 실제로 산업 기반과 인력,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등을 고려하면 정부 결정은 얼마든지 검증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왜 호남이고 TK는 아니냐”며 빠르게 지역주의를 부각하는 대결 구도로 이동했다. 국가 전략산업을 두고 지역의 몫부터 다퉜다. 박정희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여권이라고 다르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같은 호남 안에서도 전북과 광주·전남을 갈랐다. 정청래 전 대표는 전북도지사 취임식에 참석해서 “군산, 전주에 있는 시장에 가서 인사드렸더니 ‘저짝만 저렇게 많이 투자하고 우리 전북은 어쩌면 좋아’라고 하시더라”며 “여러분들이 소외감 느끼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권리당원 수가 19만 명으로 가장 많은 전북 표심이 당권 경쟁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기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현정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6월30일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호남 반도체 메가프로젝트 관련, 국민의힘 호남 비하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전형적으로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치 양태다. 지역의 정당한 문제 제기와 지역주의 동원은 다르다. 특정 지역이 반복적으로 국가 투자에서 배제됐다면 따져 물어야 한다. 어느 지역이 어떤 산업 생태계를 준비했는지, 정부 결정 과정은 투명했는지, 지역 간 역할 분담은 가능한지, 정치권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자주 반대로 간다. 산업 전략을 설명하기보다 박탈감을 자극한다. 영남에서는 호남을 겨냥하고, 호남 안에서는 전북과 광주·전남을 가른다. 정당도, 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리하면 균형발전이고, 불리하면 지역차별이다. 유리하면 지역 민심이고, 불리하면 갈라치기다.


반도체 호황이 대한민국을 구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호황이 오래갈 거라 장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을 세계와 경쟁하게 해야 할 전략산업마저 지역 간 경쟁의 재료로 소비한다면, 우리가 잃는 것은 공장 몇 기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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