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방비엥의 '불타는 보드카'와 어린 부부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3)

취재를 위한 여행과 사적인 이유에서 선택한 여행 모두가 마찬가지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돈다는 건 새로운 사람과 음식을 마주하는 일에 다름없다. 지난 30여 년. 아시아와 중동, 유럽과 오세아니아를 여행하며 기억에 남을 몇몇 사람을 만났고, 독특한 요리를 맛봤다. 그 여정을 더듬어 <지구촌 사람들과 추억을 먹다>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편집자주


19년 전. 라오스 방비엥에서 만난 어린 부부. 막냇동생 같은 이 부부가 요즘도 가끔 생각이 난다.

남편은 스물두 살, 아내는 열아홉 살이라고 했다. 그 ‘어린 부부’를 메콩강 지류가 출렁이는 라오스의 소읍(小邑) 방비엥에서 만났다. 2007년 초가을 무렵이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일곱.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상투 틀고, 연지곤지 찍어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인 두 사람이 귀엽게 보일 수밖에.


2000년대 초. 방비엥은 인구가 2만 명에 못 미치는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방갈로가 흔했는데 하루 숙박비가 5~6달러였다. 더블베드가 2개나 놓인 큼직한 방과 수영장까지 갖춘 호텔이 딱 하나 있었는데, 거기도 30달러면 하룻밤 잘 수 있었다.


젊은 남자 배우들이 방비엥을 여행하며 찍은 ‘꽃보다 청춘-라오스 편’이 방송된 게 2014년이다. 이후론 한국 관광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고.


어쨌건 19년 전 처음으로 방비엥을 찾았을 땐 ‘식당 같은 식당’, ‘술집 같은 술집’이 드물었다. 중심가 또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스웨덴과 독일, 네덜란드에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청년들은 낮에는 강물에 튜브를 띄우고 유유자적하다가, 해가 지면 바나나와 초콜릿을 듬뿍 넣은 ‘방비엔 스타일 빈대떡(?)’을 먹고, 원두막처럼 생긴 식당의 카펫에 반쯤 드러누워 라오스 맥주를 마셨다.


사실 그런 것밖엔 달리 할 게 없었다. 지금처럼 여행객을 싣고 하늘로 올라가는 열기구도, 비포장도로를 덜컹대며 달리는 버기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흘을 보내자 아직은 ‘젊은 피’가 혈관 속을 흐르던 30대의 난 심심해서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이 훌쩍 흐른 뒤 다시 찾은 라오스. 조용히 흐르는 저 메콩강만 그대로였다.

바닥공사를 하지 않은 맨땅에 삐걱대는 테이블 서너 개를 놓고 독한 러시아 보드카를 한 잔에 1달러에 파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바(bar) 비슷한 술집을 물어물어 찾아낸 건 이상(李箱·1910~1937)의 산문 <권태>를 떠올리게 하는 막막함과 무료함 탓이었을 게 분명하다.


바로 거기서 앞서 말한 부부를 만났다. 둘 모두 법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주문받은 술을 나르고, 아내는 테이블을 닦으며 저녁 6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일한다고 했다. 손님은 달랑 나 하나였다. 짧은 영어와 보디랭귀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보드카를 두어 잔 마셨을 때 그들의 월급이 남편은 25달러, 아내는 20달러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일당이 아닌 월급이 그렇다고 했다.


지난달 아내의 생일날 남편이 시장에서 산 5달러짜리 중국산 청바지를 선물했고, 그걸 받은 아내가 감동해 울었다는 말도 들었다. 라오스 사람들은 슬픈 이야기를 미소 지으며 하는 신기한 재주를 가진 듯했다.


홀로 서글퍼진 나만 감정 과잉 상태가 됐다. 이상스레 그 부부에게 미안했다.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노여움까지 함께 밀려왔고, 결국 폭음(暴飮)이 시작됐다.


그 술집엔 투명한 유리잔에 따른 보드카에 불을 붙여 마시는 메뉴가 있었다. 조그맣고 파란 화염이 눈앞에서 일렁이는 ‘불타는 보드카’를 스무 잔쯤 마셨고, 종국엔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리니 아침이었고, 숙소 침대 위였다. 머리맡엔 400달러쯤이 든 지갑과 여권이 담긴 손가방이 곱게 놓여 있었다. 손등이 조금 까졌을 뿐 크게 다친 곳도 없었다. 술이 덜 깬 상태로 방에서 나오니 호텔 직원이 말했다.


“어젯밤 당신을 부축하고 온 두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쓰린 속을 달래줄 해장 음식으론 라오스 쌀국수를 택했다. 낯선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는 뜨거운 국물을 훌훌 마시며 골똘하게 고민했다.


‘그 부부에게 어떻게 신세를 갚지?’

향신료가 강한 라오스 쌀국수를 먹는 내내 나를 도운 그 어린 부부의 선한 마음을 떠올렸다.

이틀 후. 방비엥을 떠나 비엔티안으로 가야 했다. 막냇동생 부부처럼 친해진 둘에게 45달러를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의 월급을 합친 돈.


그날 흙먼지 날리는 방비엥 버스터미널에선 “제발 받아라” “아니 받을 수 없다”며 벌어진 우리의 실랑이를 지켜본 여행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여름. 다시 방비엥에 갔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그곳엔 ‘어린 부부’도 ‘불타는 보드카’를 팔던 술집도 사라지고 없었다. 침묵하며 흘러가는 강만이 그대로였을 뿐.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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