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동아방송(DBS)이 전파를 쏘아 올린 1년 후인 1964년에 동아방송에 입사했다. 박정희 정권은 개국 초부터 DBS를 감시하면서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탄압하려 들었다. 이른바 ‘앵무새 사건’이 첫 번째이자 대표적인 탄압사례로 꼽힌다. 이 시사만평 프로그램 때문에 편성간부 6명이 1969년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기까지 무려 5년 6개월을 시달렸다. 10월 유신 이후엔 프로그램에 대한 중앙정보부와 문공부 등의 간섭과 통제가 한층 노골화했다.
정보부 요원들이 방송국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뉴스나 논평은 말할 것도 없고 오락 프로그램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제작자들의 울분이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편집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전개됐다. 방송국의 프로듀서, 아나운서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 결과 방송국의 프로그램 제작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그때까지 금기시되던 취재원을 과감히 찾아 나서는가 하면 문제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면서 진실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대량 광고 사태에 이어 마침내 동아방송에서도 1975년 1월7일부터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프로듀서와 아나운서는 물론 엔지니어와 업무 사원들까지 함께 모여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내가 해임 통보를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결혼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40대 중반 나이에 실직이라니!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렇다고 후배들이나 가족에게 풀죽은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럴 땐 오히려 호기를 부리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배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술상이 차려지고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듯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쫓겨난 지 6개월 만에 우리는 출근투쟁을 중단하고 각자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공황증이 올 법도 한데 모두가 함께해서인지 마음은 덤덤했다.
나는 동아방송에 입사하기 직전 춘천교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학교 선생이 아니면 방송 프로듀서밖에 없는데 그 두 직종에 취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박 정권의 취업 방해 공작이 워낙 지독한데다 내 경우는 나이도 들어서 같은 분야의 취업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 큰 고민은 초중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교육문제였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 교육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민하는 나에게 제강회사에 다니던 동생이 파이프, 배관 가게를 내라고 권유했다.
가게를 내고 1년이 지나자 영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섰지만 역시 서투른 경영이었다. 내 장사는 2년이 지나면서 자금 사정도 조금 나아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 자신감이 문제였다. 하루는 정장을 한 낯선 사람이 점포로 들어섰다. 병원을 새로 짓는데 배관 공사 견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순조롭게 낙찰 절차를 밟았다. 희망을 걸고 공사에 착수했으나 마무리 단계에서 사고가 터졌다. 현장 감독이 노임을 가로채고 지불을 미루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어쨌든 사업은 계속되었고 시련도 이어졌다.
감옥에서 맞은 딸의 혼사
나는 그 와중에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78년 10월24일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명동 한일관에서 기념식을 가졌고, 그날 배포된 동아투위 소식엔 지난 1년 동안 제도 언론이 외면한 민주 인권 관련 사건 120여 건이 특집 형태로 실렸다.
이 건으로 안종필 위원장,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 정연주 위원 등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나를 위원장 대리로 선출했다. 그해 연말 송년 모임에서 구속된 7명 동지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를 문제 삼아 나와 이기중, 성유보 3명을 다시 구속했다.
1979년 1월은 유난히 추웠다. 특히 조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중부경찰서의 일주일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내게 무슨 큰일을 맡기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벌여놓은 사업이나 가족을 생각하면 심란하고 답답했다.
그런 내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은 돌아가신 선친의 삶이 보여준 교훈이었다. 내 선친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 해방 후에는 민족의 분단을 막아보려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 땅에서 싸우시다가 체포되어 희생되셨다. 그분은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결단이 요구될 때 늘 나를 인도하는 별이 되어 주셨다.
1월15일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되어 독방에 갇히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감옥에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제약을 받으니 나처럼 굼뜨고 요령 없는 50대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일까.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된 젊은 학생들과 통방을 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홍 종민씨도 만난다. 걱정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구속된 지 두 달쯤 되던 2월24일, 그날은 큰딸 아이가 시집가던 날이었다. 기상하자마자 홍종민씨가 찾아와 감옥에서 만들었다는 사과술 한잔을 권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여러모로 우리를 보살펴주던 J교도관이 찾아와 “윤 선생님 오늘 하객이 800여 명입니다. 제가 직접 다녀왔습니다. 민주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소식을 전해주며 은밀하게 담배까지 한 대 붙여 주었다.
3·1절 날은 감옥에서 통방을 통해서 기념식도 가졌다. 동아투위 성유보 동지가 기념사를 하고 만세삼창도 하였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은 지 13일 만인 1979년 11월 8일 나는 동아투위 동료들 가운데 제일 먼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파이프 가게 사정을 살펴보니 그동안 자본금이 많이 축나 있었다. 가게 규모를 확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동생과 나, 두 사람이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얼마간 빚까지 안고 손을 떼야만 했다.
유신 독재가 끝나고 부풀어 올랐던 민주화의 꿈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동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제적되었던 학생들이 복학되고 해직교수들이 복직되었지만, 해직 언론인들의 복직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80년 동아투위는 신군부의 속셈이 군사정권 재창출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은 장래에 새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투위는 5월17일 수유리 명상의 집에서 ‘새시대 새언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김대중씨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일찍 해산하기로 했다. 그리고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은 당분간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의논했다.
나는 김학천 위원 동서네 집으로 숨어들었다. 저녁 무렵 집에서 전갈이 왔다. 수사관 둘이 찾아와 내가 어디 있는지 대라고 을러대면서 권총을 풀어놓고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집사람을 앞세우고 친척집까지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치가 떨렸다. 어릴 때 일제 치하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한 달 넘게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다 체포 선풍이 수그러든 7월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의 사업 실패, 그리고 꽃가게 '암슬텔담'
파이프 장사에서 아무 성과 없이 1년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가장의 체통도 서지 않았다. 빚만 쌓였다. 그럴 즈음 후배 송관율이 꽤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알로에라는 신비의 약초를 재배하는 화훼농이 있는데 동업으로 알로에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따로 투자도 필요 없고 다만 방송 홍보만 책임져 주면 지분을 나누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알로에 동업을 제의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문씨였다. 미국, 일본 등의 알로에 연구 현황과 알로에의 효능에 대한 확신에 찬 설명을 듣고 나니 믿음이 갔다. 광화문 덕수초등학교 근처에 점포를 냈다. 나는 점포에서 판매하고 송관율은 방송가를 부지런히 뛰어가며 홍보 활동을 벌였다. 2주쯤 지나고 나니 방송 홍보 효과가 나타났다. 우리 점포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섰다. 김정문 알로에 농장의 재고가 바닥나고 김정문씨가 일본으로 날아가 알로에를 수입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여섯 달 만에 빚 800만원을 모두 갚아버렸다.
그런데 다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알로에 주스가 수입되면서 잘 나가던 알로에 사업이 치명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김정문 씨는 초지일관 밭에서 기른 생초만을 고집했다. 알로에 가게는 그 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두 번이나 사업에 실패하고 나니 맥이 풀렸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점포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암스텔담이라는 꽃가게였다. 꽃가게로 간판을 바꾸어 달게 된 데는 동아투위 후배 성유보의 권유가 작용했다. 동아투위 동료들 중 기업체에 취업한 사람들이 있으니 가게는 어느 만큼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일 역시 생각과는 달랐다. 가게는 계속 조용했고 빚은 점점 늘어났다. 하는 수 없이 살던 집을 팔아 청산했다. 집을 팔고 빚에서 벗어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이 무렵 다행스럽게 집사람에게도 직장이 생겼다. 미국 여선교회가 베트남 난민을 도우려고 설립한 ‘현희공예원’이라는 곳이었다. 대단한 벌이는 아니지만 집사람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 무렵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가 결성되었는데 나는 여기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 언협은 월간지 <말>을 발행, 유신정권보다도 더 악랄한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진실보도를 위해 분투했다.
그러니 자연히 탄압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잡혀가고 압수당하고 처음부터 곡예의 연속이었다.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는 되지 못하지만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력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옳다는 판단이 서면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6·26국민평화대행진이 있던 날이었다. 김인환, 최장학, 최학래 세 동지가 암스텔담으로 찾아왔다. 가게 문을 닫고 우리 네 사람은 시청 앞으로 나갔다. 교통이 차단되고 경적이 울리고, 최루탄이 터지고 그런 아수라장 속에 한 여인이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 군중 속에 발이 묶인 동아일보사 차 한 대가 보였다. 차 안에는 전 편집국장 권아무개씨가 타고 있었다. 최학래씨가 달려가 급박한 상황을 말하고 병원으로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외면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가 그 여인을 가까운 한일병원으로 부축해 옮겨 주었다.
한겨레 합류, 늦은 귀환
6월 항쟁의 승리는 우리가 그토록 희망하던 새 신문 창간의 길을 열어주었다. 1987년 9월1일 한겨레 창간 사무국이 문을 열고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13년 동안 파이프 장사, 알로에 가게, 꽃가게 등으로 거듭 좌절을 맛본 터에 후배 동지들이 자유언론의 기치를 들고 새 언론을 시작한다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한겨레 행을 선택했다. 내가 한겨레에서 맡은 일은 주식공모, 주권을 파는 일이었다. 주식공모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새 언론을 고대하는 민주시민이 그렇게 많다는데 놀랐고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들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데 감격했다. 1988년 2월 목표액 50억원이 거뜬히 달성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안하여 100억원을 더 공모하기로 했다. 1988년 5월15일 마침내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나왔다.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1994년 3월 나는 한겨레를 떠났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자리이며 내 모든 정열을 바쳤던 신문사를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나마 내가 열심히 지원했던 ‘한겨레 21’의 창간 기념 리셉션까지 보고 떠나게 되어 위안이 되었다.
이제 여든이 넘은 내 나이,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 험난한 길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한겨레신문사 전무를 역임했던 동아투위 윤활식 위원은 1929년 1월8일 평북 의주생으로 2021년 1월2일 별세하셨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시킨 아내와 아이들에게 죄를 지은듯하여 면목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또 다시 내 앞에 1975년과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신에게, 내 선친에게, 역사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큰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다만 국가가 저지른 과거의 모든 잘못은 반드시 바로 잡혀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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