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사건 피의자 신상 공개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아파트 흡연장에서 만난 주민을 폭행해 숨지게 한 20대 남성의 신상은 공개됐지만 일본도로 주민을 살해한 30대 남성은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도 살해 피의자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 서울경찰청은 피의자가 정신질환자일 가능성이 있고, ‘피해자의 유족’이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봤다.
피의자 신상공개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경우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일본도 살해 사건 기사에는 ‘범행 동기가 공익’이라며 범죄를 옹호하는 댓글이 달려 충격을 주었다. 문제의 댓글 작성자는 피의자의 아버지로 드러났고, 결국 포털이 나서 댓글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보면 피해자 유족의 안전에 대한 수사기관의 우려에도 수긍이 간다. 그런데 피해자 유족을 보호한다며 수사기관이 가해자 신상을 비공개하는 것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정작 피해자 유족은 ‘법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달라’며 신상 비공개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JTBC가 이번 논란을 보도하며 ‘익명보도 원칙을 선언한 1998년 대법원 판례 때문에 수사기관이 신상 공개를 결정하지 않으면 흉악범이라도 신상 공개를 할 방법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 점도 관심을 끈다. JTBC를 포함한 몇몇 언론사는 이미 수사기관의 공개 결정에 앞서 주요 사건의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 적이 있다. 수사기관이 신상 공개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흉악범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는 언론이 먼저 공개하고 어떤 경우는 수사기관을 쳐다보는 건지, 혼란스러운 일이다.
SBS는 2020년,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신상을 경찰의 신상공개위원회 심의 하루 전에 공개한 적이 있다. 당시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공개했느냐’는 비판이 있었고, 실제로 경찰 심의위는 다음날 공개를 결정했다. 그런데 심의위의 결정이 미리 정해져 있었을 리는 없다. 만약 언론이 먼저 보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심의위가 이번 일본도 사건처럼 비공개를 결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어도 공개를 강행할 언론사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피의사실공표죄는 원칙적으로 수사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언론이 피의자 신상을 파악해 보도한다고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JTBC가 보도한 것처럼 1998년에 나온 대법원 판결을 통해 언론의 범죄 피의자 신상 보도는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범죄 보도가 공익성이 있다고 해서 피의자가 누구인지를 보도하는 것까지 공익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바로 그 판결이다. 이혼 소송 중인 남편을 청부 폭행하려 했다는 혐의가 단정적이고 선정적으로 보도됐던 여성에게 무죄 판결이 나온 뒤 경찰과 언론의 책임을 물은 사건이다. 당시 대법원은 무리한 보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아예 범죄 보도에서 실명 보도에 공익성이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단정적, 선정적 범죄 보도로 당사자에게 지나친 피해를 주는 것은 ‘피해 최소화’라는 언론윤리 원칙에 비춰봐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아예 익명보도를 원칙으로 선언하고 몇몇 예외에만 책임을 면제해 주는 방식이 과연 합당한지는 조금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범죄 보도에서의 익명보도 원칙이 초상권 보호 확대로 이어지고, 이제는 길거리 영상을 통째로 흐림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익명보도 원칙에 개인정보 보호 강화 요구가 결합하면서 법원이 판결문을 공개할 때 그래도 공인은 실명을 쓰던 관행도 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을 ‘박○○ 대통령’으로 표기하더니, 이명박 대통령을 ‘J대 대통령 C’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범죄 피의자 이름을 모조리 공개하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미국처럼 판결문 원문을 그대로 공개하라는 것도 아니다. 공익성을 이유로 모든 부수적 피해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익명보도 원칙이 나온 출발점인 단정적이고 선정적인 보도에 대한 언론의 성찰을 전제로, 누군가의 실명을 언급하는 일이 이렇게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어야 하는지 고민해 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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