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50년 전의 가을, 저는 어느 환한 날 한국기자협회장이 되었습니다. ‘문득’이라고 덧붙여도 좋을 만큼, 저는 제가 일하는 문화부 기자 일을 즐기고 있는 중에 느닷없이, 그 삼엄한 자리에 들어앉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기자협회란 모임에 생소했고 그 단체 일에는 더욱 무지해 있었는데, 저보다 몇 해 아래 의욕이 넘치는 후배 기자들이 맡아 일해달라고 저를 협회로 떠밀었고, 정황을 들여다보고는 그 수고를 마다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기자협회장이 정부의 한 기관 대변인이 되겠다고 나섰고, 이건 기자협회의 체면상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여론이 분분해 있었습니다. 그분은 결국 대변인 자리를 단념했지만 기자협회 일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2000명 기자들의 모임은 구심점을 잃게 될 참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사를 비롯한 언론사들도 매우 예민해 있어 유신 체제를 강요하는 권력의 압력 아래 신문 방송 기사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기자들의 손에서 빼앗아 집권자 손맛에 들여 나약한 꼴로 만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긴장 속에서 기자들은 진실 기록인의 당당한 책무로서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자유롭고 당당하게 쓰고 싶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일들이 당시의 언론기업주들에게는 회사를 기자들에게 빼앗기는 일로 여겨지고 있었고 제가 기자협회장 되는 것을 그 첫걸음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끝내 회사에서 해직 처분을 당하고 이듬해 봄에 물러나야 했습니다. 제 회장직은 12대, 13대에 걸쳤지만 그 재직기간은 7개월을 넘지 못했습니다. 반세기 전의 언론계가 이처럼 유치하고 미숙해 있었습니다.
이후 자유인이 된 저는 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고 그들 일에 초대받기도 했지만 기자란 직분, 기사 쓰기의 일에는 아주 쫓겨난 처지가 되었습니다. ‘평생 기자’가 되고 싶던 젊은 날의 제 꿈도 잃어버렸구요. 그랬기에 요즘의 기자분들이 활달한 태도로 우리 때는 생각도 못한 노트북을 들고 혹은 스마트폰을 내밀며 활달하게 글 쓰고 녹음하는 모습을 기특한 마음에 젖어 바라봅니다. 기사를 쓰고 전하는 방식과 수단이 아주 달라져, 제 구닥다리 눈에는 참으로 참신하고 힘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정치-경제와 사회, 체제와 문물, 그리고 그것들을 대하는 방법과 태도에는 자유롭고 자신만만한 의지가 당당하고 힘들이 넘쳐, 부럽지 않을 수 없고요. 제가 그럴 수 있기를 간곡하게 바랐지만 끝내 얻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세상은 바뀌고 사람살이 내용도 참 많이 달라졌지만, 이 고단한 삶에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 참된 알갱이를 세상에 전달하는 데 기자들의 참 직분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인간다움의 바른 힘으로 안겨올 것이며, 그렇게 하는 일은 자유라는 틀에서 가능하다는 진실은 때를 가림 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한없이 유효하리라 믿습니다. 이런 재우침은 제 손주들보다 뜻을 같이하는 후배들에게 보내는 듯한 동지적 열정으로 드리는 자상한 격려와 기대에서 일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천생의 직분이 존속하는 한, 진실을 향한 기자들의 집념과 용기도 함께할 것이라고, 저는 기자협회의 60년 역사를 뜬 눈으로 바라보며, 여전히 굳게 믿고 있습니다. 기자의 직분이 이 세계에 대한 응시와 관찰, 사유와 판단, 기록과 공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언관(言官)이면서 동시에 사관(史官)일 수 있는 기자의 천생의 노릇임이 분명합니다. 인간 공동체의 삶에는 이 두 가지 노릇이 더불어 해야 할, 존재의 의미와 시간의 보람 쌓기일 것입니다. 기자의 이 무거운 선택과 행동은 곧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있음, 생각하고 기억하며 말하고 글 쓰는 지적 존재로서의 아름다운 의미를 깨닫고 더불어 살며 키우고 움직이는 존재임을 확인시켜줍니다.
기자로서의 이 당연한 일들이 곧 인간의 인간다움을 보증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 하염없는 노역의 단초가 되고 있음을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면서, 그 끊임없는 진전을 향한 도전과 도정의 인류사에 저는 따듯한 격려를 보냅니다. 그렇습니다. 그 일은 이 무상한 역사에 대해, 이 무정한 세계를 향해, ‘한국기자협회 60년’이라는 겸손하되 시대적 의미가 갈수록 무거워지는 사건이 일구어내는 분명 하나의 감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주환·김병익·정성진·김태홍… 강제로 물러난 기자협회장들
김병익 12·13대 기자협회장은 한 번의 연임에도 불구하고 재임기간은 6개월 남짓이었다. 내무부 대변인 전직설로 물의를 빚고 사퇴한 전임 회장의 잔여 임기 4개월을 마치고 1975년 3월 연임했지만 한 달여 만에 회장직을 사퇴해야 했다. 김 회장이 취임하고 며칠 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터졌다. 10·24 선언을 계기로 언론자유운동이 전국 언론사로 들불처럼 번졌고 동아일보 광고 사태를 거쳐 이듬해 3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났다.
기자협회는 그 물결의 한복판에서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유신독재는 계략을 꾸몄다. 1975년 4월24일 중앙정보부(중정)는 김 회장 등 8명을 남산으로 연행해 4박5일간 억류했다. 중정은 국제기자연맹(IFJ)과 국제언론인협회(IPI)에 한국 언론계 사태를 알리는 기자협회 보고서를 구실로 회장단에게 “국가모독죄를 적용, 구속하겠다”고 협박했다. 중정은 사퇴를 조건으로 회장단을 풀어줬고, 김 회장은 4월29일 사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손주환 8대 회장은 기자협회 창립 이래 임기만료 전에 사퇴한 첫 번째 회장이었다. 1971년 4월 동아일보에서 시작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언론사 14곳로 확산하자 기자협회는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과 결의문을 채택하며 연대했다. 그해 12월6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며칠 뒤 손 회장은 돌연 사표를 제출했다. 한국기자협회 30년사는 “손 회장은 사직서에 ‘일신상의 사유’라고 밝혔으나 비상사태선포 이후 기협 운영과 관련해 관계당국으로부터 개인적인 압력을 계속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고 기록했다.
1979년 기자협회는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3월31일 소집된 대의원대회는 성원 미달로 무산됐고, 두 차례에 걸쳐 회장 입후보 공고를 냈으나 단 한 명의 후보도 나오지 않았다. 말기적 증상을 보인 박정희 정권의 무차별적 언론탄압과 일부 경영진이 자사 기자들의 기협 활동을 막았던 배경이 있었다. 4월 하순 정성진 CBS 정치부 차장이 단독 출마해 18대 회장에 당선됨으로써 기자협회는 위기 상황을 넘겼다. 정 회장은 기자협회 활동 강화에 나서고, 기자 폭행 비판 성명을 주도하며 저항의 불씨를 지펴갔다. 정 회장은 8월 미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연행됐다. 부인 선물로 산 0.5캐럿 다이아반지에 대해 밀수혐의를 씌운 것이다. 기자협회 탄압을 위한 정권의 각본으로 이뤄졌다는 의혹이 짙은 가운데 정 회장은 9월21일 취임 5개월 만에 사퇴했다.
8대 손주환 회장, 12·13대 김병익 회장, 18대 정성진 회장이 강제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면 20대 김태홍 회장은 구속됐다. 1980년 3월 기자협회장에 선출된 김 회장은 출근 첫날 기자협회 회장실 문 앞에 ‘기관원 출입금지’라고 써붙였다. 중정, 보안사 등 기관원들이 무시로 언론사에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서울의 봄’을 군화로 짓밟은 전두환 신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민주인사 수백 명을 지명수배했다.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의 검열·제작거부를 주도했던 기자협회 간부들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받고 구속됐다. 검거를 피해 도피했던 김 회장은 끝내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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