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납품'하는 한국사회가 빚은 화성 참사

[이슈 인사이드 | 노동] 김지환 경향신문 정책사회부 기자

김지환 경향신문 정책사회부 기자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은 김대중 정부는 이듬해인 1998년 노사정 합의를 거쳐 파견법을 도입했다. 국난 극복을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가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워낙 힘이 강했던 시기였다.


파견법 도입에 따라 ‘노동조합’이 아닌 곳도 사용 사업주에게 파견 노동자를 보낼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직업안정법에 따라 노조만이 근로자공급사업을 할 수 있었다.


파견법 제정으로 파견노동 빗장이 풀렸지만 원칙적으로는 파견을 금지하고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을 제외한 일부 업무(제정 당시 26개 → 2007년 32개로 확대)에만 파견을 허용하며 파견기간도 2년으로 제한한다는 제동장치가 있었다. 파견 허용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제동장치가 마련됐던 것은 파견에 ‘중간착취’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개입해 이익을 취하는 중간착취는 쉽게 말해 ‘사람장사’다. 근로기준법 9조(중간착취의 배제)가 중간착취는 법률에 따라 예외적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칙적 금지·예외적 허용’이지만 파견은 제조업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다. 사용자들이 파견 규제를 피할 수 있는 꼼수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 발명품의 이름은 위장도급이다.


원청 대기업은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의 경우 파견이 허용되지 않자 사내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는 우회로를 택했다. 서류상으로는 전문성과 기술이 있는 사내하청업체가 도급받은 업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내하청업체는 원청에 인력만 공급했다. 현대차·기아·한국지엠 등 완성차 업체, 포스코·현대제철 등 철강 업체가 사내하청업체로부터 불법적으로 인력을 파견받았다는 판결이 잇달아 나온 것도 ‘무늬만 도급계약’이 만연하다는 걸 방증한다.


대공장에선 하청노조가 조직되고 원청을 상대로 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이 이어졌다. 하지만 영세 사업장이 몰려 있는 산업단지 불법파견은 사각지대에 방치됐다. 고용노동부는 제대로 된 감독을 하지 않았고, 노동운동은 산업단지 불법파견에 익숙해져갔다.


“2013년부터 산업단지 불법파견에 대한 문제제기가 노동계 중심으로 이뤄지자 대놓고 파견법을 어기는 방식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위장도급 형태로 파견법을 피하는 꼼수가 늘었다(정현철 금속노조 시흥안산지역지회장).” 대표적 사례가 지난달 24일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사고가 난 경기 화성시 아리셀이다. 아리셀은 메이셀이라는 사내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어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견 노동자들’은 메이셀이 아니라 아리셀 지휘·명령을 받고 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메이셀은 참사 당일 50명가량의 노동자를 아리셀에 보냈다. 일용 파견 노동자를 사실상 아리셀에 ‘납품’한 셈이다. 파견 등 간접고용은 화성 참사의 직접적 원인은 아닐 수 있지만 피해 규모를 키운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일용 파견 노동자들은 사업장 유해·위험요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동부는 ‘파견 규제 완화’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중간착취 금지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9조를 근거로 ‘직접고용 원칙’을 말하는 것이 되레 멋쩍은 세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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