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6·7·7-1코스는 서귀포시 원도심 한 건물에서 끝난다. ‘치자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된다’는 제주 어멍들 이야기가 들어맞은 6월21일, 제주 바다색의 창틀․플래카드가 눈길을 끄는 이 건물 1층에 들어섰다. 배낭을 멘 채 길을 묻고, 밖으로 걸음을 내딛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제각각. 라운지에선 보라색 상의의 여성 외국인,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제주올레 완주증서’를 들고 차례로 벽 앞에 섰다. 27개 코스 올레길 총 437km를 걸은 완주자가 포즈를 취하고 ‘땡땡땡’ 종을 치자 환호가 나온다.
이곳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여행자라운지’, ‘올레스테이’를 운영하는 (주)간세의 김은남 대표가 박수를 치며 “산티아고 순례길과 올레를 공동 완주한 분이고”, “남자분은 퇴직을 하셨는데 여기 일주일 숙박하면서 서귀포권을 걷기 시작해서…”라고 기자에게 귀띔한다. “조식시간에 이렇게 (숙박객) 마음 상태가 보이는 거 같아요. 서로 ‘오늘은 어디 가세요’ 같은 대화를 하다 언뜻언뜻 속 얘기를 하고 걷고 돌아와 살아나고, 복잡한 얼굴로 왔다가 편안하게 가는 걸 볼 때가 보람이죠.”
(사)제주올레의 파트너법인 대표는 시사IN 편집국장직을 포함해 28년 간 기자로 살았다. 스타트업 대표론 3년차다. 2021년 연말, 1967년생 기자는 정년을 약 6년 남기고 퇴사했다. “기자는 할 만큼 했고” “후배들은 충분히 성장했고” “바뀌는 언론판에 적응이 힘들다” 느낄 쯤, 과거 시사저널․시사IN 동료였던 (사)제주올레 안은주 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직접 하던 사업을 분할하는데 ‘공간 법인’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지역사회와 시너지에 관심이 컸고 취재도 해온 터, 특히 ‘원도심’이란 단어에 혹했다. “난 해본 적 없는데?” “이 공간 외에 원도심 기반으로 계속 다른 공간도 만들어보려고. 선배, 원도심 바꾸는 거 해보고 싶다며” “그러네?”
28년 기자로 살다 3년 전 제주로… 올레 여행자 베이스캠프 운영
설득을 당했지만 현실적 고민이 따랐다. 2000년생 첫째는 군대를 갔고, 남편은 갑자기 울산으로 발령이 나며, 당시 고1이던 2005년생 둘째가 서울에 혼자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후배들이 ‘굉장히 독립적인 신가족 모델’이라고 표현하는 이 가족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양심상 찔렸는데 인생의 모든 기회가 다 갖춰서 한 번에 오진 않잖아요. 둘째가 ‘혼자 잘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친정 엄마만 슬퍼하신 거 같은데 (아이가 있는 서울) 집 10분 거리에 있어서 올 수 있었죠 뭐.”
85학번인 그는 1990년 대학 졸업 후 잡지 편집기자, IT회사 사보 기자를 거쳐 1993년부터 취재기자 일을 시작했다. 1995년, 창간 때부터 동경하던 시사저널에 경력 입사했다. “호기심 많고” “무사태평 낙천적”이고 “워커홀릭”인 기자는 사회부, 기획특집부, 정치부, 경제부를 거쳤고 1년 50번 잡지 커버스토리 중 20번 가량을 혼자 쓰기도 했다. 올레를 만든 (사)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을 기자 동료, 편집장으로 만난 것도 이때였다. 2006년 6월 기자 인생 전환점이라 할 ‘시사저널 사태’가 벌어졌다. ‘삼성 이학수 부사장의 힘이 너무 세졌다’는 기사를 사장이 삼성광고로 대체했다. 파업을 이어가던 기자들은 1년여 만에 회사를 떠났고 “꼬깃꼬깃 한 돈을 선뜻 내주고, 회사로부터 고소 당한 독자”의 후원·지지를 바탕으로 2007년 시사IN을 창간했다.
투쟁 말미 노조 사무국장을 맡아 살림을 꾸리고 단식농성을 한 그는 창간 멤버였고 2010~2012년 시사IN 3대 편집국장을 맡는다. 2014년 한번 쓰러진 후부턴 “기사를 쓰다 죽을 거 같아서” 사업부서, 미디어랩에서 일했다. “조근조근 맞는 말만 하는 엄한 데스크”였고 “극강의 T라 위로는 못하지만 고민을 잘 들어주고 어렵지 않은 선배”의 퇴사는 남은 후배들에겐 “큰누나·맏언니가, 파운딩 마더가 집을 나간 일”로 다가온 측면도 있다.
‘집 나간 선배’는 2022년 2월 출근 첫날부터 심각했다. (사)제주올레가 길을 내고 관리․운영한다면 (주)간세는 ‘도보여행자를 위한 로컬 베이스캠프’를 꾸린다. 후원이 중요 수입원인 취약한 구조. 특히 “도보여행자 숙소가 비싸게 받을 수 없다”는 방침 하 여행자 라운지(식당 및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첫 달 직원 월급날 딱 되니까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은 하루 120~150명이 오가고, 총 45개 침상 중 평균 30~40개가 차지만 처음 왔을 땐 코로나19 여파 속 도미토리의 숙박률이 50%가 안 되는 상태이기도 했다.
서귀포 어머니 정성 영감받아 ‘어멍밥상·어멍술상’ 사업화
첫해 제주시 센터 건립이 무산되고 여러 지원사업에서도 고배를 마시며 본격 ‘브랜딩’에 착수한다. 업의 본질을 “오고 가는 여행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게 하는 환대”로 잡고 “현지인에게 초대받아 먹는 밥상”으로 사업화했다. 기존 직원식당처럼 운영되던 곳에서 밥을 지어주던 서귀포 토박이 어머니들의 정성에서 힌트를 얻은 ‘어멍밥상’, ‘어멍술상’ ‘어멍소풍’(도시락)이 대표적이다. ‘예비 사회적기업’, ‘강한 소상공인’, ‘관광벤처’ 등 회사 앞에 붙어온 명칭은 그간 고민의 증거이자 성과이기도 하다. “저도 그 밥을 먹으면서 서귀포에 적응을 했어요. 슴슴하고 소박한,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밥상인데 사실 몇십 명이 오면 저는 그냥 국을 떠가면 되지 않나 싶은데 어머니들 고집이 있어요. 국은 반드시 뜨겁게 나가야 한다 해서 올 때마다 국을 새로 끓이는데 손님은 알아보더라고요.”
요즘 그는 “아침에 한라산을 보고 눈을 뜰 수 있는 집”에서 20분을 걸어 조식시간에 출근한다. 여행자 기척을 살피고, 코스 시작점에 데려다주는 ‘샌딩 서비스’, 지역주민과 함께 걷는 ‘시작올레’ 등 중요 일정부터 챙긴다. 프로그램이 있는 날엔 저녁까지 머문다. “포스기 앞에서 쩔쩔매던” 그는 어느새 “사람이 많으면 몸이 힘들고, 없으면 마음이 힘든”, 그러면서 정규직 직원을 5명에서 8명으로 늘린 스타트업 대표가 됐다. 최근엔 센터 반대편 낡은 모텔을 리모델링해 구축 중인 간세스테이션이 과제다. 여행 약자를 위한 숙소이자 여행자와 지역이 만나는 거점을 꿈꾸는데 자금문제로 지체 중이다. 건물이 눈에 띌 때마다 “아, 장마 전에 엘리베이터를 놨어야 하는데” 하는 그를 보니 방문한 후배들이 “왜 아직도 워커홀릭이냐”고 핀잔주는 게 이해된다.
제주 올레길 6·7·7-1코스는 서귀포시 원도심 한 건물에서 시작한다. “믿을 만한 선배, 동료가 손을 내밀어줘서 운이 좋았고, 결 맞는 사람끼리 같이 꿈을 꿔보는 거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편해지진 않았지만 다른 길에선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직업으로 올레를 오니까 올레를 걸을 수가 없어요. 너무 바쁘고, 걷다가도 고칠 것만 보여서. 내가 그럴까 싶었는데 3주도 안 걸려서 마감일을 잊더라고요. ‘후배는 언론계로 끝났다’ 했는데 젊은 친구들 보면 뿌듯해서 그것도 아닌 거 같고요. 기자 때 제주 내려와서 걷고 가곤 했는데 새삼 기자야 말로 걷는 게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기획·기사 고민 말고 걷는 데 집중해서 걷고, 또 쉬러 많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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