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확성기 소리는 끝났다. 하지만 정치권의 승패와 상관없이 언론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현직에서 적절한 유예기간을 두지 않고 바로 정치권으로 넘어가는 문제는 여야 모두에서 반복됐다. 비판 보도를 향해 징벌적 손해배상제 주장으로 맞서는 것도 낯익은 모습이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까지 총선 기간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며 논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번 선거방송심의위가 내린 결정들은 앞으로 법적 평가는 물론 끊임없이 공론장에 불려 나와 평가받을 것이다. 심의 과정에서 나온 위원들의 발언들도 마찬가지다. 비판을 무릅쓰고 그런 선거방송심의위를 구성한 곳이 바로 지금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나는 한국의 언론 제도, 그 중에서도 특히 방송 규제체제는 지금 총체적으로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제도가 있고 업무가 돌아가니 겉으로는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도의 전반적인 취지는 증발해 버린 상태에서 영혼 없는 좀비처럼 꾸역꾸역 움직일 뿐이다. 일각에서 쉽게 얘기하듯 현 정부의 언론장악, 방송장악이라고만 규정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된 지 제법 오래됐기 때문이다.
지금 언론 제도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여야 두 진영이 서로의 민낯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여야는 언론 문제에서 상대가 특별히 더 명분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각자 권력 유지나 획득에 유리한 방향으로 언론 정책을 끌고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언론장악, 방송장악이라고 삿대질한다. 돌이켜보면 정권을 쥔 쪽이 방송 규제기구를 장악하고, 공영방송 사장까지 원하는 사람으로 앉힐 수 있는 현 제도의 기본 틀은 수십 년째 그대로다. 비판하다가도 막상 집권하면 제도와 기구를 그렇게 운영했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논리다.
언론계도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대선 때는 캠프마다 언론인과 언론학자, 시민단체 출신들이 넘친다. 선거가 끝나면 언론 관련 기구에 들어가거나 총선 출마를 노린다. 각자 서 있는 진영의 시각에서 ‘언론개혁’을 외친다. 자신이 하려는 것은 언론개혁이고, 상대가 하려는 것은 언론장악이다. 여야에 들어간 전직 언론인 출신 인사가 외치는 언론개혁의 내용도 다르다.
이제 어느 정권 탓을 하거나, 누가 더 못했나를 따지는 건 시간 낭비다. 총선은 끝났고, 마침 대선 때까지는 큰 선거도 없다. 이런 기회에 언론 제도에 깊숙하게 뿌리박고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덜어내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을 정치적으로 구성해 여야 대리전을 치르게 만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도 마찬가지다. 언론중재위원까지 캠프 출신을 앉히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 선출 권력의 민주적 정당성이니 하는 말로 언론 제도를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각종 언론 관련 제도를 정치 경력의 징검다리로 삼는 관행도 막을 내리게 해야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언론 관련 문제들은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딱 맞다. 현 집권 세력은 이런 일을 벌이면서도 전 정권 때 벌어진 일들을 들이대며 오히려 큰소리를 쳐왔다. 사실 가짜뉴스 대책은 어떤 것이 어느 정권 정책인지도 헷갈릴 정도다. 이 와중에도 야당 일각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타령이다.
상대방의 잘못으로 자기 잘못을 정당화하는 이런 상황이야말로 왜 이런 부조리한 공생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지금의 제도 아래서 얼마나 황당한 일이 가능한지 생생하게 드러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야 모두, 자신들이 상대방에 비해 딱히 명분에서 앞서는 처지가 아니라는 걸 속으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잘잘못 따지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진짜 언론 제도 전반에 대한 진솔한 논의를 시작하는 게 필요하다. 군사작전 하듯 몇 달 시한을 정해놓고 소동을 벌이지 말고, 다음 정권부터 시행하는 제도를 만드는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마침 남은 대통령 임기보다 새 국회 임기가 1년 더 긴 절호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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