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유출 시장에 부는 엉뚱한 '한류' 바람

[이슈 인사이드 | 경제] 오찬종 매일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오찬종 매일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중국뿐 아니라 요즘엔 미국, 인도, 유럽까지 한국산이 안 팔리는 곳이 없습니다.”


K-드라마나 K-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산업의 핵심 기술 유출에 대한 한 기업인의 하소연이다. 한류의 바람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다. 핵심 산업 기술이 잇따라 해외로 반출되는 사고가 급격히 늘고 있다.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 주도권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우리나라의 기술 인재를 빼가려는 인력 쟁탈전이 격화되고 있다. 최근엔 유출 경로가 주로 중국으로 향하던 것이 미국·유럽 등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의 기술 우위가 순식간에 소실되는 ‘기술 싱크홀’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SK하이닉스의 핵심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연구원이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이직한 것에 대한 전직금지 가처분이 뒤늦게 인용됐다. 2022년 SK하이닉스를 퇴사한 A씨는 경쟁사에 2년간 취업·용역·자문·고문 등의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후 A씨는 이를 어기고 이직했지만 재판부는 신청 7개월이 지난 후에 가처분을 받아들였다. 후발주자였던 마이크론은 그사이 SK하이닉스보다 먼저 신제품 양산을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 전 임원 등이 반도체 공장 도면을 빼돌린 뒤 중국에 복제 공장 설립을 시도하다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산업포장 수훈을 받았을 정도로 국내 반도체 산업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어서 업계의 충격은 더욱 컸다.


또 다른 국가산업의 한 축인 자동차에서도 기술 유출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국산화에 성공한 수소차 연료전지 부품 핵심 기술이 유출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차에서 정년퇴직한 직원이 넘긴 정보가 미국 기업에 유출됐다.


방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국방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기술자들이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자료를 유출하려다 수사 당국에 적발됐다.


실제 최근 5년 새 산업 기술 유출이 적발된 건수는 96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20년간 추산한 피해 규모는 100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방위적인 유출이 계속되자 정부는 뒤늦게 부랴부랴 수년간 문제로 지적된 ‘솜방망이’ 처벌 기준을 무겁게 만들기로 했다. 양형기준을 현행 15억원 이하에서 최대 65억원으로 올리는 등 처벌 강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난해 발의된 후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산업계에선 개정안도 기술 유출 범죄를 억제하기에는 한참 역부족이라는 입장이다. 몰수나 추징 확대 등 처벌 수준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신속한 결정을 위해 일본, 대만처럼 기술 유출 사건만 다루는 전문 법원이나 전담 재판부 신설을 검토해볼 수도 있다.


첨단 산업의 핵심 기술을 경쟁 국가 기업에 넘겨주는 것은 알이 아닌 닭을 통째로 넘겨주는 것과 같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데이터로 일군 기술 초격차가 일시에 무력화된다. 대한민국은 기술이 아닌 제품을 파는 나라여야 한다. 기술을 파는 나라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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