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969년생 권은중 작가는 나이 쉰에 유학을 떠났다. 20년 넘게 기자였다가 갑자기 이탈리아로 떠나 요리공부를 했다. 지금은 ‘푸드 라이터’다. 그의 이야기는 ‘특정 와인의 특징, 얽힌 스토리, 페어링하기 좋은 음식’ 추천부터 ‘먹는 곡식이 다른 사회에선 전혀 다른 경제·사회사가 펼쳐진다’는 역사를 넘나든다. 인류사 모든 대소사를 먹는 문제로 바꿔서 보는 ‘음식 환원론자’이고, “수강생이 맛보라며 가져온 100만원 짜리 와인”에 “20만원 정도면 적당하겠다”고 하는 미식가다. 홀로 작업실에서 막걸리, 소주를 만들어 맛보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잘 알면 잘 먹을 수 있고, 그게 중요하다는 신념이 기저에 있다. 지난달 23일 서울 지하철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권 작가는 “점심 때도 소테른(와인)을 한 잔 먹고 왔다”고 했다. “귀부와인은 곰팡이가 얼마나 피었는지 보고 포도알을 일일이 손으로 따서 비싼데 요즘 싸요. 하루 한 잔이면 사실 커피 한 잔 값이거든요. 알면 알수록 좋은 걸 먹을 수 있는데 제가 재벌 회장보다 아마 잘 먹고 살 거예요. 음식이 공장에서 나오고 땅과 유리돼 있는데 아무도 음식 교육을 시키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프죠.”
열혈 기자였다. 대학 졸업 후 광고대행사에서 5년을 일하고 1996년 월간 사회평론 길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온다. 미디어오늘과 시사저널을 거쳤고 이후 문화일보와 한겨레에서 약 10년씩을 일한다. “나쁜 놈들 혼내주는 재미가 있어서 세게 했다.” 주로 사회부, 경제부에서 활약하며 <여택수씨 롯데 돈 3억원 우리당 창당자금 의혹>, <청와대 직원 성매매 혐의 입건 “기강 잡아라” 음주 자제령> 등으로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요리하는 남자가 드물고, ‘혼밥’을 이상하게 보던 2006년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작한 게 요리였다. 당시 아내가 입원을 하며 ‘경상도 남자’에겐 생존 문제이기도 했다. “쉬워서 맛이 대충 나오는 파스타로 간 게” 변곡점이 됐다. 재미를 붙여 요리를 계속하고 친구·가족들과 나눠먹다가 첫 책 <독학파스타>(2011년 8월 출간)를 2009년 20여일만에 썼다. 2014년엔 <10대와 통하는 요리 인류사>를 내놨다.
‘요리’와 ‘음식에 얽힌 이야기’에 대한 ‘덕질’이 ‘업’이 된 건 한겨레 토요판팀에서 일하던 2017년 6월이었다. 기자보다 “책 쓰는 게 훨씬 새롭고 재미있”어서 “대책 없이 관뒀다.” 일과 병행해 기고하며 마감을 어기거나 연재 중단을 반복했는데 전업으로 책을 쓰자 했다. 이 원고가 바탕이 된 <음식경제사>는 각종 작물, 멸치젓, 맥주, 콜라 등이 각 국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정리한 저작인데, 책이 정년을 포기한 이유였다. “퇴사한 해 수입이 500만원이었다.” 유학결심은 섰지만 돈을 더 벌어야 했고, 아내를 설득할 시간도 필요했다.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 사무처장으로 1년여를 일하고, 11개월 유학을 ‘지천명’에 떠났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 ‘ICIF(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 3개월을 공부했다. 제법 요리를 하는 줄 알았는데 “하루에 빵 레시피만 10개씩 알려주고” “기숙사엔 조리기구가 없어 복습이 불가능한” 심화 과정은 벅찼다. “첫 달은 매일매일이 ‘현타’였다.” 토리노의 레스토랑에서 이어진 4개월 인턴실습도 험악했다. 말을 못 알아듣거나 실수를 하면 손에 잡히는 대로 “프라이팬” “불에 달군 바비큐용 벽돌”이 날아왔다. 하루 15시간씩 일하면 한두 달 만에 10kg이 빠진다는 걸 알게 됐다. 살인적인 노동으로 자신보다 “5살 어린 셰프가 두 번이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레스토랑 개업 목표를 보류한다.
인턴 후 볼로냐와 시칠리아에 머물며 “이탈리아가 로마법과 기독교뿐 아니라 빵과 와인으로 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을 채운다. 그해 12월 귀국했고 다시 어학연수를 가려 했지만 팬데믹이 왔다. “제일 힘들었어요. 꿈을 좇으면 급여가 절반으로 준다는데 해보니까 5분의 1 토막이 됐어요. 언제 2분의 1이 되나 했다니까요. 2022년부터 강연도 다시 들어오고 회복이 좀 됐어요.” 결국 ‘100시간 넘는 요리수업보다 좋아했던 50시간쯤 되는 와인강의’와 ‘이탈리아’가 남았다. 현재 와인, 음식, 이탈리아 인문학 관련 강연, 방송, 기고가 수입원이다. 문화센터나 북클럽에서 주 단위 강의 1개, 월 1회 강연을 2개 한다. 매주 방송 2개를 하고 4주에 한 번 경향신문과 농민신문에 기고한다. 잠정 휴업 중이지만 와인수입 법인 대표다. 맞벌이를 한다지만 ‘타야린 파스타와 와인을 팔지, 빨간 멜론을 쓴 젤라또를 만들지’ 고민은 진행형이다.
“‘양폭’(양주폭탄주)을 표면장력으로 11부로 말아 낮엔 9잔, 밤엔 11잔을 먹던” 기자는 다른 삶을 산다. 대책 없이 관두고 7년 후 지금 “이룬 게 별로 없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레시피대로 되는 생이란 요리는 불가능하고 우린 ‘내 요리가 뭔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정할 수 있다. 책 저자 소개에 적히는 꿈이 매번 바뀌지만 골자는 같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요리를 아는 이다. 좋은 와인, 맛있는 요리는 그에게 일이지만 이 분투의 과정에 그 음식들, 함께 할 친구가 있으면 훨씬 낫다고 몸소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러워하는 옛 동료도 있는데 사실 애쓰고 있거든요. 길이 나긴 하는데 아주 고통스럽게 나니까. 그래도 ‘와인은 어려운 게 아니고 함께 시간을 나누는 거군요’ 할 땐 보람이 커요. 계속 이탈리아 음식, 와인 관련 일을 할 거 같긴 합니다. 기자들에게 관심사로 책은 써보라고 하고 싶어요. 또 담배, 술보다 음식 때문에 죽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관심을 더 가져주면 좋겠어요. 전 그걸 하려고 나온 거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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