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수순이었다. 뉴스9 앵커가 전격 교체되고, 메인 시사프로그램이 편성 삭제 후 폐지됐다. 사장은 자사 기자들이 지난 몇 년간 불공정 편파 보도를 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없는 기준에 따라 KBS에서 일련의 의사 결정들이 이뤄졌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 기획은 사실상 제작 중단 지시로 불방 결정됐다. 제작본부장은 이미 촬영의 40%가 진행돼 제작의 8부 능선을 넘은 방송의 철회를 지시하며 불방의 원인을 4월 총선 전후 영향을 미칠 정파성 탓으로 돌린다.
세월호 참사는 맹목적 취재 경쟁으로 ‘전원 구조했다’는 잘못된 사실을 전한 언론의 보도 참사로도 기록되는 사건이다. 참사와 무관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도 잇따랐다. 이에 언론에 대한 전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킨 사회적 재난이었다. 무분별한 유족 취재, 생존자나 피해자 이야기를 보상금으로 엮어내는 후진적 보도 관행에 윤리적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새 10년을 맞은 세월호는 참혹한 언론의 현실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성찰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매년 신문과 방송, 이 사회가 4월16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의 잘못을 반성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다짐이다. 하지만 이번 KBS의 결정을 통해 진보는커녕 후퇴한 언론의 위치를 확인한다.
지난 21일 눈이 내리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마이크를 들고 절규했다. 10년 만에 다시 KBS 앞에서 촛불을 든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가 선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엇을 우려하는지 물었다. 4월10일 총선을 위해 4월18일 방영 예정인 방송의 제작을 6월 이후 시점에 다른 재난들과 엮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을 주제로 만들라고 한 이유를 듣고자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입장문을 통해 “국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지” “재난 참사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 포기”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정권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불방 사태는 2014년 보도 참사로 상처를 받은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 다시 한번 언론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KBS는 방송법으로 지정된 재난방송주관사다. 수신료의 가치를 약속하며 국민을 위한 방송을 해야 하는 공영방송이다.
그러나 작금의 KBS는 앵커가 대통령을 따로 만나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대신해 대담을 진행하고, 편집된 신년 메시지를 방송하는 매체가 됐다. 공영방송이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기능, 사회적 공감대를 전달하는 역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KBS 박민 사장의 미션인가.
혼란스러운 조직 내에서도 회사의 방향을 잡아보려는 노력은 있다. 사장이 사과한 기사를 작성한 당사자 기자들은 KBS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청구하는 조정신청서를 냈다. KBS 시사교양 PD들은 기수별로 성명을 이어가며 세월호 기획의 4월 방영을 요구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의 통제 강화가 속도를 내며 힘을 잃고 있다.
정파성은 세월호 기획이 아니라 KBS 조직에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KBS는 제작이 무산된 ‘다큐인사이트’의 이인건 PD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기획을 정파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누구냐”라는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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