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김성녀를 찾아서

[이슈 인사이드 | 문화]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사지원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김성녀(金姓女·김씨 성을 가진 여성), 나이 69세, 치료 기간 2주일.’


1925년 10월24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도초도 소작 쟁의 당시 중상자 명단의 일부다. 전남 무안군 도초도(현 신안군 도초도)에서 발생한 소작 쟁의는 소작료 수탈로 인해 농민들이 일제에 저항한 대표적 항일운동이다. 도초도 주민 200여명은 소작료 인하 투쟁을 하던 소작인회 회원들이 구속되자 석방을 요구하며 목포경찰서로 몰려갔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시위 참여자들을 구둣발로 차고 군도로 때리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중상자 명단을 통해 여성 농민들이 거친 시위 현장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산의원에 입원한 중상자 4명 중 3명은 김성녀와 김소사(金召史·김씨 성의 과부)와 같은 이름 없는 중년 여성이었다. “늙은 부인들은 발을 구르며 남자들의 기개가 부족함을 통매(痛罵·몹시 꾸짖음)하며 우리는 일제히 광주로 가서 매 맞고 굶어서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1925년 10월23일 동아일보 보도에도 목포경찰서에서 도초도로 돌아가려는 남성들을 설득해 광주형무소로 원정 투쟁을 이어가려 하는 여성들의 당찬 모습이 남아있다.


이런 기록들은 독립기념관과 민간 학자 네트워크 ‘역사공장’ 등이 함께 발간한 시리즈 책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에 의해 발굴됐다. 역사학계를 넘어 일반인들도 역사 지식을 소비하고 공유하는 ‘공공역사’를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대중서다. 시리즈 전반을 기획한 이지원 대림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시민들이 여성 독립운동을 어떻게 소환하고 기억하느냐는 역사가만이 아니라 공공이 나눠야 할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독립운동가의 부인 혹은 남매 같은 혈연관계로서만 주목받았다. 특히 옥고를 치른 객관적 기록으로 확인되는 독립운동 특성상, 가족을 돌보는 여성의 활동은 온전히 기록되고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여성들도 농어민 여성과 여학생, 근우회 등 다양한 집단으로 독립운동에서 활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시리즈. /독립기념관 제공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학생 운동이라 하면 남성 교복과 베레모만 떠올린다. 그러나 1930년 1월 발생한 경성여학생연합시위에선 수많은 여학생이 경찰 심문을 받아야 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정신여학교생 하운학은 “시위행렬을 실행하는 것은 조선인도 이 정도의 뜨거운 혈기가 있고, 또 불평을 품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경성여학생연합시위는 1929년 11월 광주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됐지만, 교과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딸로만 간략히 언급된 지복영은 광복군에 입대해 활발히 활동했다. 오히려 가정사로 인해 아버지 지청천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순간도 많았다고 한다. 23살에 적진 부근에서 일본군에 편입된 한국인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맡는 등 그녀 자체로 독립운동 업적을 많이 남겼다.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해방 후 80여년이 되도록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보다 성차별이 뿌리 깊고 봉건적 요소가 강했던 일제 강점기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조명할 가치가 있다.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더 많은 사료를 들여다보고, 발굴한 사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조용히 묻혀 있는 또 다른 수많은 김성녀와 김소사가 나올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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