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동의제가 방송법 위반? KBS 노사 격돌
[보도국장 등 임명동의제 무력화되나]
박민 사장, 노조 단협 보충협약 추진
KBS본부 "모든 구성원 투표권 요구"
KBS 정관·편성규약 해석 쟁점될 듯
박민 KBS 사장은 경영진으로부터 제작·보도의 독립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장치인 ‘국장 임명동의제’를 끝내 무력화할까. 지난 24일 박 사장은 긴급 보고 안건으로 소집한 KBS 이사회에서 “임명동의제 준수는 방송법 위반” 등의 이유를 들어 단체협약에 명시된 임명동의제에 대해 노조와 보충협약을 하겠다고 나섰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28일 보충협약 교섭에 응하는 대신, KBS본부 조합원에게만 부여했던 임명동의제 투표권을 비조합원 포함, 해당 부서 전 구성원으로 확대할 것을 사측에 요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보도국장 등 임명동의제가 필요한 5대 국장 공석 사태가 3주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결국 임명동의제가 폐지 수순을 밟는 건 아닌지 KBS 내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KBS에서 국장 임명동의제가 자리 잡은 건 지난 2019년. KBS 노사는 그해 단체교섭에서 통합뉴스룸국장(보도국장), 시사제작국장, 시사교양2국장 등 국장 3명에 대한 임명동의제에 합의했고, 2022년엔 임명동의 대상을 기존 3명에서 시사교양1국장, 라디오제작국장을 포함한 5명으로 확대한 단협을 체결한 바 있다. 임명동의제 신설 당시는 SBS를 시작으로 지상파 3사 모두 국장 임명동의제를 도입한 시기였다. 절차, 방식 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미 대다수 종합일간지는 편집국장 임명동의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이사회가 끝난 24일 당일 KBS 사측은 곧바로 보도자료를 배포해 △방송법 위반 △단체교섭 무효 해당 △이사회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아 무효 등 세 가지 이유로 “현행 임명동의제로 5대 국장을 임명할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날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에 국장 임명동의제와 관련해 단체협약 보충협약 체결을 위한 교섭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먼저 방송법엔 ‘공사의 직원은 정관에 따라 사장이 임면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KBS 정관엔 임명동의제를 규정하고 있지 않아 위법하다고 사측은 주장한다. 또 임명동의제는 “사장의 인사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며 지난 2015년 5월 연합뉴스 노조가 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단체협약 이행 가처분 결과를 예시로 들었다. 그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연합뉴스의 단체협약상 임명동의제는 사용자의 인사권을 지나치게 제한해 사실상 사용자의 인사권을 박탈하는 정도에 이르는 것이어서 부당하다”며 기각을 결정했다. 임명동의제가 신설되고 대상자가 확대될 때 이사회의 보고·심의·의결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들면서 “임명동의제는 인사 사항으로 KBS 경영에 관한 최고 의결기관인 이사회의 의결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거치지 않아 절차적 하자로 유효성이 문제될 수 있다”고 했다.
KBS본부는 지난 27일 자료를 내어 사측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규정한 방송법 제4조에 따라 KBS는 편성규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데, KBS 편성규약 제16조엔 국장 임명동의 조항이 명시돼 있어 임명동의제 이행은 방송법 위반이 아닌 방송법 준수라는 게 KBS본부의 지적이다. 또 사측이 주장한 ‘연합뉴스의 가처분 사례’는 연합뉴스 노조가 항고심과 본안을 다투지 않은 사안이고, MBC 파업 관련 지난 2022년 대법원이 판시한 공정방송, 단체교섭 법리를 반영하지 않은 과거 하급심 판례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해당 대법원 판례에 따라 KBS본부는 “임명동의제 또한 공정방송 의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단체협약 대상에 포함됨이 명확하다”고 밝혔다. 또 지난 2020년 KBS의 ‘2019년 KBS 방송편성규약 개정 보고서’에 2019년 편성규약 개정 시 임명동의제에 대해 정기이사회 간담회에 보고된 점이 명시됐다며 사측의 ‘이사회 보고가 없어서 무효’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도 했다.
KBS본부는 28일 성명에서 “임명동의제를 확대해 구성원 전체의 의지가 반영된 명실상부한 제도를 만들 것이다. 사측은 스스로 보충협약 교섭을 요청한 만큼 성실히 교섭에 응하라”며 “해당부서의 80~90%가 어떤 노조이든 조합원이었던 과거와 달리 신생노조 설립과 비노조원 증가에 따른 상황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충협약 교섭 계획을 밝혔다.
KBS 사측의 임명동의제 무력화 조짐은 새 사장 취임 때부터 감지됐다. 지난 13일 박민 사장 취임과 동시에 간부급 인사를 발령한 KBS가 후임도 정하지 않은 채 전임 국장들을 타 부서로 보냈기 때문이다. KBS는 지난 23일자로 평사원 인사까지 진행했지만 현재까지 임명동의제 대상자를 지명하지 않고 있다.
다만 KBS 사측이 임명동의제 폐지를 요구하는지, 운영방식 일부 조정을 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KBS는 임명동의제 위법성을 주장한 지난 27일 사보특보에서 “임명동의제를 실시하더라도 언론사마다 세부 운영 방식은 KBS와 다르다”며 “MBC의 경우 임명동의 대상인 국장의 해당 국에 소속된 직원과 계약직 전체가 투표에 참여하고 있고, SBS는 해당 부문의 전체 재적인원이 투표를 하는 등 비노조원도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타사 사례를 들기도 했다.
또 박민 사장은 24일 KBS 이사회에서 ‘임명동의제 후속 방안’을 묻는 이사의 질의에 “회사가 가진 몇 가지 방안들에 대해 여기서 밝히게 되면 노사의 협상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어 양해해 달라”며 “긴급한 상황인 만큼 이후 후속 조치는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KBS본부는 “사측은 내용 없는 보충협약 요청서만 일방적으로 송부한 상태라 사측이 배포한 언론 보도자료로 내용을 추측해보면 임명동의제 폐지를 위한 보충협약을 요구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이어 “임명동의제 폐지는 단체협약 보충협약 대상이 아니”라며 “임명동의 없이 인사 강행 시 방송법 위반 등 추가고발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KBS기자협회와 ‘대안노조’로 출범한 같이노조 또한 임명동의제가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형철 KBS기자협회장은 “이번 주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의견 수렴 절차를 진행하려고 생각 중”이라며 “임명동의제는 보도 공정성과 취재·제작의 자율성을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무력화된다면 기자들은 당연히 비판적이고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0일 같이노조는 KBS본부에 국장 임명동의제 참여를 요청한 바 있다. 권준용 같이노조위원장은 “‘노사는 근로조건 중 하나인 공정방송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단협대로 임명동의제를 실시해야 하고, (KBS본부 외에) 전체 조합원들에게도 투표권이 적용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며 “본부노조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보충협약에 참여할지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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