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할 줄이야.” 지인 소개로 알게 된 공인중개사가 느닷없이 한탄을 쏟아냈다. 최근 꽤 괜찮은 원룸으로 이사했는데 집주인이 잠적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놀랍지 않은 소식, 전세사기였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시라 조언했다. 그런데 궁금했다. ‘공인중개사도 전세사기를 당하는구나.’ 그때 그가 내뱉은 말은 이건 그냥 전세사기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HUG가 중도에 보험을 해지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느 전세사기와 다르다는 판단이 들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해당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났다. 모든 세입자들이 지난 8월30일 HUG 보증보험 해지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이틀 뒤부터 집주인은 연락을 끊었다.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보증이 된다는 믿음으로 입주했지만, 이유도 모른 채 보증이 해지됐고 이를 알게 된 집주인은 잠적한 사건이었다.
사라진 임대인은 지난 8월 말까지만 해도 연락이 됐었다. 하지만 보증보험이 해지되자 임차인들이 중도계약 해지를 요청했다. 보증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집에 살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중도계약 해지 요청이 잇따르자 임대인은 한꺼번에 많은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었고 결국 잠적하고 말았다. HUG발 전세사기의 시작이었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사례인 것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다. 사라진 임대사업자 A씨 소유의 건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건물들의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모두 7채 180여 가구였다. 다른 건물의 세입자들도 만났다. 같은 피해를 호소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영문도 모른 채 보증보험 해지 통보를 받고 집주인은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HUG가 180여명의 세입자들의 마지막 안전망을 일시에 끊어버린 것이다.
HUG는 해당 임대사업자가 가입 당시 허위 서류를 제출한 것이 뒤늦게 확인돼 보증을 해지했다고 밝혔다. 임대사업자의 보증보험 가입은 의무이다. 이 과정에서는 깡통전세를 막기 위한 요건이 있는데 이 요건을 맞추기 위해 허위 계약서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마저도 HUG가 먼저 안 것이 아니다. 한 세입자로부터 보증보험에 나타난 계약 내용이 다르다는 말을 듣고 자체 조사를 한 뒤 알게 됐다. 그렇게 부정 가입을 확인했고 A씨가 신청한 모든 건물의 보험을 중도에 해지시켰다.
취재를 통해 HUG의 부실한 보증보험 제도가 드러났다. 집주인이 허위로 보증보험 계약서를 제출하면 임차인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HUG가 임차인들에게 실제 계약서에 적힌 보증금이 맞는지 확인만 했더라도 이번 전세사기를 막을 수 있었다. HUG의 편의를 위해 그저 관행처럼 임차인 확인도 없이 보증보험을 가입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HUG의 보증보험 해지사태는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잔인한 행정조치였다. HUG가 애초에 검증만 제대로 했었더라면 입주조차 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아니면 세입자들 입장에서 무턱대고 보증을 해지해선 안 될 일이었다. 국가기관의 안전장치도 한순간에 깨져버린 사건이었다. 철저한 책임 규명과 재발 방지 그리고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를 위해 보도를 시작했다.
보도 뒤 HUG의 책임 있는 사과와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후 국정감사에 출석한 유병태 주택도시보증공사 사장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HUG의 제도적인 허점을 인정하고 보증보험 가입절차의 개선을 이뤄낸 것이다. 경찰의 수사 전담팀 구성으로 피의자 검거도 이뤄졌다. 은닉재산 환수를 빠르게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현존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 방법이다. 현행 특별법으론 피해자 구제에 한계가 있다. HUG 또한 피해자 구제에는 발을 빼고 있다. 법 개정을 통한 피해자 구제가 큰 과제로 남았다.
이제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꿴 청춘들이, 신혼의 부푼 꿈을 꾼 부부들이, 어렵게 살아가는 취준생 등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도록 보도를 통해 취재를 이어갈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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