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독립을 위한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이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신호탄이 될 법안이 1987년 방송법 제정 36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어 입법의 마지막 고비만을 눈앞에 둔 셈이다. 축포를 터뜨릴 만한 일이지만 언론계 반응은 미지근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가 유력한 상황에서 최종 입법이 무산될 가능성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여당인 국민의힘은 13일 윤 대통령에 방송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공식적으로 건의했다. 앞서 9일 방송통신위원회 역시 입장문을 통해 “여러 문제점을 고려할 때 ‘법률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일단 관계부처와 각계 의견을 들어보겠다는 입장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거부권 행사로 결론 내렸다는 관측이 나온다. 입법을 위해 지난 1년간 노력해온 과정을 떠올려보면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할 만한 뚜렷한 명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허탈함을 키운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언론계뿐 아니라 정치권의 해묵은 과제였다. 그동안 공영방송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사장이 내려오고 논조가 바뀌는 등 매번 논란을 빚었고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이번 방송법 개정안이 만시지탄이라는 우려 속에서도 기대를 모았던 이유다. 윤 대통령 역시 과거 인수위 시절부터 주요 국정 과제의 하나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과 신뢰성 확보를 꼽았고, 이를 위해 이사회 구성과 사장 선임 절차를 바꾸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비로소 정권과 공영방송의 유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기회가 온 셈인데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여당과 정부가 개정안을 두고 ‘민주당을 위한 입법’이라고 비판하는 일도 근거가 없다. 개정안은 공영방송 운영에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취지로 국민 5만명의 청원을 바탕으로 마련됐다. 현행 9~11인이었던 공영방송 이사회 이사 수를 21명으로 늘리고, 여야 정치권이 분할 독식하고 있던 이사 추천 권한을 학계와 방송계, 시청자에게 나눠 갖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여당은 언론 학계와 방송종사자들이 대부분 민주노총 소속이라며 “민주노총의 ‘노영(勞營) 방송 영구화 법안’”이라고 말하는데 지극히 부당하며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여당이 대통령 거부권을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할 정치적 수단으로 남용하고 있다는 점은 가장 큰 문제다. 대통령 거부권은 헌법에 규정된 고유 권한이지만 국회 입법권을 침해할 수 있는 만큼 행사는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앞서 여당은 방송법 개정안이 입법 단계를 밟아나갈 때마다 대통령 거부권을 매번 입에 올렸다. 이번에도 방송법 개정안 저지와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탄핵안 저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이동관 구하기’를 택하며, 방송법은 대통령 거부권이라는 카드를 쓰면 된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당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적 행위 없이 거부권 행사 카드를 남발함으로써 여야 협치의 의미를 퇴색시킨 것은 물론 갈등 조정의 핵심이어야 할 대통령의 권위마저 실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번 법안 통과를 돌아보면 아쉬운 지점들은 많다. 방송법 개정안은 우리 사회가 함께 숙고해야 할 쟁점 법안이었고, 야당이 힘의 우위를 앞세워 밀어붙일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 삶을 바꿀 중요한 법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식의 갈등 탓에 불필요하게 좌초해서도 안 될 일이다. 거부권을 거부하는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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