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트라우마 여전… "퇴근길 지하철서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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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일간지 A 기자는 지금도 문득문득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떠오른다. 1년 전 참사가 있던 그날, 그는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꼬박 10시간을 현장에 있었다. 수많은 하늘색 모포를 보고, 취재를 하고, 2시간 정도를 집에서 잔 후 다시 빈소 취재를 했던 날이다. 당시엔 “너무 바빠서, 내 상태가 어떤지 살필 틈이 없어서” 계속 취재만 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건 그로부터 2주 정도 뒤였다. 어느 날 보고서를 보는데 글자가 읽히지 않았다. A 기자는 “회사에 증상을 얘기했더니 휴가를 줬다”며 “2주간 정신과를 다니면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이후 어느 정도 나아지는 기분이 들어 회사에 복귀했고, 어느 순간부턴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지금도 일부 기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사진은 이태원 참사 1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 이태원역 인근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 공개된 모습. /뉴시스


A 기자는 그때만 해도 다 나은 줄 알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는 “얼마 전이다. 이태원 참사 딱 1년 됐을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퇴근길에 지하철이 엄청 붐볐다”며 “꼼짝도 못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너무 힘들더라. 한 정거장 타고 가다가 내리고, 사람이 좀 빠진 것 같아 다시 탔는데 그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렸다. 그때 다시 병원에 가야겠다, 그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이태원 참사 직후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A 기자는 “그날 역에 사람이 너무 많았던 기억 때문인지 그 뒤로 지하철 대신 웬만하면 버스를 탔다”며 “그런데 출근하는 곳이 지하철이 편해 어쩔 수 없이 타고 다니던 중 증상이 다시 나온 것이다. 트라우마가 여전히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 상황 봤던 충격, 유족 취재하며 겪은 도덕적 상해 등 복합 작용

A 기자뿐만 아니다. 1년 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지금도 일부 기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피해 상황을 그대로 목격한 충격에 더해 유가족들을 취재하며 겪은 도덕적 상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참사 당일 현장 취재를 했던 방송사 B 기자는 “빈소 취재 당시 유족에게 질문을 안 하면 제대로 일을 못 하는 기자, 질문을 하면 피해를 준 기자라는 생각에 굉장히 고통스러웠다”며 “이 생각이 정리가 안 되고 계속 이어지니 이후에 비슷한 사고가 나올 때마다 매번 자괴감을 겪었다. 지금도 사고가 나고 빈소를 취재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트라우마 반응은 대개 단기적으로 경험하지만 한동안 잘 지내다가 몇 개월 또는 몇 년 후 재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참사 직후뿐만 아니라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자들의 트라우마를 예방하고 관리할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온다. 경제지 C 기자는 “저 역시 참사 직후 잔상이 좀 남아 선배가 정신과를 연결해줬고 상담을 받았다”며 “당시 괜찮다는 판단을 받긴 했지만 사실 아직도 사고가 난 그 장소에 가는 것은 꺼려진다. 최근 1주기를 맞이하며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오고 다시 힘들어하는 기자들이 있는데, 언론사가 단기적으로 현장 기자들을 챙겨주는 데서 나아가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나타나지는 않는지 살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업무상 트라우마에 대한 기자사회 인식이 높아지면서 그간 다수의 언론사들은 진료비, 상담비를 지원하거나 전문 상담 기관과 연계해 기자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덕분에 상당수 기자들은 정신적 충격을 해소하고 진료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다만 일각에선 언론사들이 상담의 질을 지금보다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종합일간지 D 기자는 “회사와 연계된 상담센터 두 곳을 갔는데, 직종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상담이 너무 별로였다”며 “한 곳은 뜬금없이 재활훈련을 하고 다른 곳은 ‘데스크 지시가 싫다면 거부하라’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길 했다. 기자 업무를 잘 모르니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차라리 언론인 전문 상담 기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일부 언론사에선 외부 상담에만 의존하지 않고 참사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끼리 모여 심리적 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유진 경향신문 기자는 “참사 이후에 당시 상황이랄지 아니면 힘들었던 점, 그럼에도 좋았던 점을 서로 얘기하는 시간을 따로 가졌는데 그게 많은 도움이 됐다”며 “회사의 심리 상담 지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구성원끼리 얘기하는 시간도 그만큼 필요하다 생각한다. 덕분에 지금은 당시만큼 힘들거나 하진 않다”고 말했다.

고통 겪는 취재 기자들, 서로 모여 심리적 외상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경향신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지난 7월 ‘이태원 참사 이후 재난 보도 자료집’을 냈다. 세월호 참사 취재 기자 4명과 이태원 참사 취재 기자 8명을 인터뷰해 그 내용을 묶은 책자다. 임아영 경향신문 젠더데스크는 “지난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약 한 달간 12명의 기자를 인터뷰했다”며 “그러니까 어떤 경위로 취재를 했고 어떤 딜레마와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지금 생각은 어떤지를 다 정리한 자료다. 재난 보도를 미리 상상해볼 수 있도록, 한편으론 같이 고민하고 토론을 해보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자료집은 경향신문 수습 교육 때 제공된다. 교육 과정 중엔 참사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가 빈소 취재 윤리 등을 강의한 후 사건팀 일진과 수습들이 함께 토론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안현의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태원 참사는 굉장히 큰 사건이기 때문에 다시 그 기억이 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고 몇 년이 지나도 생각날 때가 있을 것”이라며 “안 좋은 감정들이 나의 현재 일상이나 대인관계에 지장을 주기 시작한다면 그땐 전문가나 의사를 만나는 게 좋다. 하지만 생각이 나는 것 자체는 정상적인 반응이고, 그럴 때 동료들 간 상태를 공유하고 서로 지지해주는 분위기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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