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이스라엘에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현장 사진에 무참히 희생된 민간인들 모습이 찍혔는데 공교롭게도 분쟁과 아무 관련 없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아서 놀랐던 적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활용하며 나름 ‘공생’해온 이스라엘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충원하면서 팔레스타인 쪽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기만적인 공생의 제스처마저 집어치우려 하고 있던 때였지요.
이집트가 아직 호스니 무바라크의 통치를 받던 시절, 홍해에 특별경제구역을 만든다며 중국 톈진 경제특구 운영당국의 도움을 받아 요업공장을 건설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민혁명 뒤 리비아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중국이 전세기를 띄워 수만 명에 이르는 자국민 노동자들을 호송해오던 장면도요. 2016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을 동시에 순방했을 때 이집트가 시 주석을 맞기 위해 전투기를 4대 띄웠다는 둥, 그러자 사우디는 경쟁하듯 8대를 띄웠으나 이란은 한 대도 안 띄우며 제국의 위용을 과시했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던 기억도 나네요. 중동에서 점점 커져가는 중국의 존재감을 보여준 장면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궁지에 몰린 미국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도적 참상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라 아직은 뭐라 진단하고 전망하기 힘들지만,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던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들뿐 아니라 가자지구의 자기네 주민들까지 희생될 것이 뻔한데도 비극을 자초했다는 사실이 비애스럽습니다. 그들의 좌절감도 이해는 됩니다. 이란의 배후조종, 늘 나오는 ‘대리전’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더 클 것이고 미국은 궁지에 몰리겠지요. 세계의 모든 분쟁에서 가장 큰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는 다릅니다. 탄생부터 영국이라는 강대국 덕을 본 이스라엘이 70여년 간 온갖 악행을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늘 편들어준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팔 문제를 당사자들의 힘으로는 풀 수 없는 분쟁으로 만든 것은 미국입니다. 50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이름만 그럴싸한 중동 평화 프로세스, 다자간 협상이라는 흥정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미국이고요. 그래서 이 분쟁은 유독 강대국의 책임이 절대적으로 큰 분쟁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 반미정서의 핵심 요인이자, 미국 도덕성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결부된 문제가 되면 미국은 출구가 없어 보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지만 두드러진 성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란·사우디 중재로 ‘피스메이커’ 부상한 중국
반면에 중국은 올 3월 이란과 사우디의 화해를 중재해 피스메이커로 떠올랐죠. 올해처럼 중동에서 진창에 빠진 미국과 중국의 부상이 대비된 해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올 초 중국은 이-팔 분쟁의 중재자로 나설 뜻을 비췄고, 2월에는 “대화와 협의를 통해 국가 간 이견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를 주창했습니다.
이번 공격 뒤 미국, 영국, 인도, 일본 등이 줄줄이 하마스를 비난할 때 중국은 “관련 당사자들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자제하며 즉각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을 뿐입니다. 비판이 일자 민간인 살상을 규탄하기는 했지만 하마스를 명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사우디 외교장관과 통화하면서 이스라엘의 행동이 자위권 범위를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13일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가 이끄는 미국의 초당파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하마스를 비난하도록 중국에 압력을 가했다고 합니다. 신화통신은 미국은 그동안 일방적인 태도로 국제사회가 합의한 ‘두 국가 해법’을 지연시켰고, “현실을 무시한 정치적 책략으로 이스라엘과 아랍의 화해를 주선하며 지역 긴장의 불씨를 키웠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의 친구”인 중국의 특사가 곧 중동에 갈 것이라 했는데 예고대로 자이쥔 특사가 19일 카타르에 도착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중국 외교부에서 중동 문제를 다뤄온 베테랑입니다. 자이 특사는 “분쟁의 근본적인 이유는 팔레스타인 국민의 정당한 국가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중국 정부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이고 첨단기술 분야에서 ‘혁신적 포괄적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중국이 ‘친아랍적’이라 보고 의심합니다. 중국 특사의 역할은 상징적인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중재’ 노력을 무시하려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1992년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기 전까지 중국은 확실히 팔레스타인과 더 친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해온 역사가 있죠. 2008년 미국과 이스라엘이 “중국 은행이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 같은 테러집단의 돈세탁과 관련돼 있다”고 비난했으나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중국이 평화중재자로 나선 이유는 경제적 이해관계
역내 위상을 높이고 싶은 정치적 목표와 지역 안정을 꾀해야 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중국을 평화중재자로 나서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동유럽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손실을 본 중국은 중동 분쟁이 가라앉기를 절실히 바란다는 해석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 중국의 지렛대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란은 좀 다르죠. 미국은 무력충돌이 확대되지 않도록 이란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중국에 촉구했습니다. 더이상 역내에서 말발이 먹히지 않는 미국이 외려 중국을 활용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국이 이란-사우디 합의를 이끌어냈을 때, 알자지라방송은 “전통적으로 분쟁에 관여하길 꺼려온 중국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중동에서 미국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다’라는 쪽이 압도적인 듯합니다.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중국 스스로도 아직 그 책임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중동의 안보는 계속 미국이 주도하게 놔두되, 그 그늘에서 외교적·경제적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당분간 중국의 합리적인 선택지일 겁니다.
중국은 미국과 달리 ‘선량한 강대국’ 이미지를 부각시켜왔습니다. 미국과 달리 중동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경제적 밀착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중동 국가의 국내 문제에 불간섭 정책을 택해온 데다, 미국처럼 특정 국가를 싸고도는 일도 없습니다. 침공이나 제재를 한 적도 없고요. ‘아랍 바로미터’의 작년 8월 여론조사에서 중동과 북아프리카 시민들은 워싱턴보다 베이징에 더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중동 돌아다니는 중국 전함…군사적 팽창 신호?
중국이 군사적 팽창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동과 가까운 동아프리카 지부티에 해군 기지를 만들었고, 아덴만 해상작전에도 꽤 적극적이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 항구에 눈독을 들인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2021년 11월 바이든 정부는 중국 국영기업 코스코쉬핑(중국원양해운공사)이 아부다비 칼리파 항의 인프라 건설을 맡으려 하자 ‘잠재적 군사시설’이라며 아부다비를 압박해 무산시켰습니다.
이번 중동 충돌 뒤에도 눈에 띄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중국 국방부 웹사이트에 따르면, 중국 군함들이 오만을 방문한 데 이어 18일 쿠웨이트 슈와이크 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예정된 친선 방문’이었다지만 쯔보, 징저우, 첸다오후 등 중국 전함들이 중동을 돌아다니는 게 예사롭진 않습니다.
물론 아직 중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 같은 군사력을 보유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당분간의 목표는 에너지 흐름을 보장받는 것과 함께 ‘가장 적은 비용으로 위상을 높이는 것’이 되겠죠. 그러면서 ‘평화의 중재자’가 되는 게 가능할까요? 안보를 제공하지 못하면서 협상 판을 이끌 수 있을까요.
중국이 경제적 보장을 지렛대 삼아 중재한 협상이 이행될 것인지가 중요하겠죠. 이란과 사우디의 관계 정상화가 제대로 안 되면 중국의 성공도 빛이 바랠 겁니다. 이 합의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 이란, 사우디 대표와 함께 왕이 부장이 ‘보증인’처럼 서명을 했지만 ‘합의 위반’에 관한 대응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내세울 당근과 채찍은 불확실합니다.
중국은 분쟁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스스로 이해관계를 조절하며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이슈에서 중재자로 나설 경우, 미국처럼 장기적인 분쟁에 휘말리게 될 우려도 큽니다. 무엇보다 중국은 강대국일지는 몰라도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인권을 지키는 나라로는 평가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라도 희망의 일부를 걸어야 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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