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3일, 수백 명의 시위대가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와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며 EU에 다시 가입하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은 브렉시트 때문에 노동자와 빈곤층이 특히 피해를 입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거비와 에너지 비용은 물론이고 대중교통 요금마저도 비싼 영국이지만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보다도 꽤 낮은 수준이었다. EU의 신선한 농산물이 도버해협을 건너 곧바로 실핏줄처럼 뻗은 유통망을 통해 전국에 공급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EU와 갈라선 2020년 1월 이후 복잡한 통관 절차가 생기면서 공급망에 극심한 병목현상이 나타났다. 늘어난 시간과 비용은 가격에 반영됐다. 런던경제대학(LSE)은 2019년 이후 25%가 오른 영국 식료품 가격 상승분의 1/3은 브렉시트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브렉시트 이후 공급망이 불안해지고,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다른 수입 물가도 폭등했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에 브렉시트의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영국인들은 수십 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살인적인 생계비로 고통을 겪고 있다. 경제 전반이 충격을 받으면서 브렉시트로 영국 GDP가 5.5%까지 감소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사실 2016년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를 할 때 이미 예상됐던 것이었다. 당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에 반대하면서도 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하는 승부수를 던져 보수당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재미를 봤다. 공약에 따른 투표 결과는 놀랍게도 51.9%대 48.1%로 브렉시트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사건’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들은 당시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보수 언론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더 선’이나 ‘데일리메일’ 같은 ‘탈퇴’를 주장하는 보수 매체들의 발행 부수가 ‘잔류’를 주장하는 매체의 4배에 달했다. ‘떠나자’는 이들의 선동적인 메시지는 SNS 등으로 퍼지며 탈퇴 여론을 효과적으로 자극했지만 잔류를 주장하는 매체들의 영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여론 조사 기관 ‘유고브’는 영국의 미디어들이 대개 보수적 정치세력에 경도돼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데일리메일’, ‘텔레그래프’ 같은 보수성향의 매체들이 ‘가디언’과 같은 진보 성향 매체를 압도하는 양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은 보고서에서 단지 3개의 기업이 영국 신문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며 소수에게 집중된 미디어 지형의 문제를 지적했다. 특정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동을 걸고, 이들에게 동조하는 다수 미디어가 여기에 뛰어들면서 지금 영국이 겪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가 잉태됐다는 문제의식이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겪은 일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국가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고, 연합왕국인 영국이 분열될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지난 7월 ‘유고브’ 여론 조사에서는 브렉시트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응답이 5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브렉시트를 후회한다는 ‘브리그레트(Bregret)’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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