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핀닥터 복귀와 당구공의 단단함에 관하여

[5개 방송사 노조위원장 릴레이 기고]
⑤고한석 전국언론노조 YTN지부장

권력기관을 동원해 압박하던 방식이 성에 차지 않았던지, 윤석열 정부는 돈줄을 죄어 공영방송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기자협회보는 KBS·EBS·TBS·YTN·MBC 등 5개 방송사 노조위원장 연속 기고를 통해 방송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하는 권력의 움직임과 그 파장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고한석 전국언론노조 YTN지부장


“기자가 그런 것도 몰라?” 기자로 밥 벌어먹기 시작한 뒤부터 종종 듣는 말입니다. 상식의 부족을 힐난하는 거라면 기자 이전에 민주시민으로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합니다. 하지만, 기자라면 마땅히 세상사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따지는 거라면 난감하죠. 그래도 한때는 절차탁마의 계기로 삼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기자가 어떻게 다 알아?”라고 되묻습니다. 이런 적반하장식 대응은 대화에 긴장감을 유발해 상대가 스스로 화제를 돌리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자라는 직업인이 독한 직업적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해 부대끼는 걸 막는 훌륭한 방어기제이기도 하죠.


당연합니다. 기자는 세상일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사, 기자는 수줍게 공부하는 직업이 아니라 잘 몰라도 뻔뻔하게 묻고 떠드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경제·외교 등 특정 분야의 ‘전문기자’ 역시 기본적인 취재의 태도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런데 기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잠시나마 제도적으로 장착할 때가 있습니다. 출입처라는 곳에서 그렇습니다. 보도자료는 훌륭한 교재고, 필진은 그 분야 최고 전문가입니다. 그들은 을을 자처해 온 힘을 쏟아 내용을 설명합니다. 대부분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후쿠시마 핵 폐수 방류 입장처럼 구렁이 담 넘어갈 때도 있습니다. 법조 출입이라면 법조인일 테고, 경제부처라면 경제관료겠죠. 보도자료를 배포할 때면 그들은 기자들의 일타강사이자, 국민의 알권리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는 국민의 충복이 됩니다.


이러다 보니, 기자들은 한 출입처를 오래 나갈수록 ‘출입처 사람’들과 친밀도가 높아집니다. 여기에 보도자료와 더불어 밥과 술이 동반되는 한국식 문화가 더해져 ‘티키타카’가 쌓여가면 ‘그들의 논리’에 동화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언론계는 미국 등과 다르게 출입처를 수시로 바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YTN은 24시간 보도전문 채널이라는 특성상 쉴새 없이 뉴스를 생산해야 해서, 출입처 의존도가 높습니다. YTN 기자들은 특히 더 출입처와 밀착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예를 들어 “선배, 제가 당직자처럼 돼 가는 거 같아요. 출입처 옮겨야겠어요”라는 말을 저는 후배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입처와의 거리두기를 내면화한 YTN 동료들이 자랑스럽고, 덕분에 ‘기레기’라는 말을 들어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인 이상, 서글플 때는 있습니다. 또 떠나야 하는구나…. 이 동네 이제 겨우 알 것 같은데 이별이라니. 출입처 안녕.


그런데 워낙에 정이 넘쳐서 그러는지, 애정 결핍 때문인지, 출입처와 도무지 분리되지 못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끝내 미련을 못 버리고 아예 적을 옮겨서 청와대 홍보수석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건 아주 드문 성공 사례고, 대부분은 여의도를 떠돌며 구직 및 구애 행위에 열중합니다. 이렇게 분리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는 기자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핀닥터’의 파트너이자 친구들입니다. 전화 한 통화로 보도 방향 바꾸고, 대통령님이 칭찬하신다며 전화도 바꿔주는 훈훈한 관계. 스핀닥터는 볼링이나 당구에서 회전을 넣어 공의 방향을 조정하듯 언론에 영향을 미쳐서 기사 내용을 바꾸고 권력에 이로운 보도로 만들어 내는 전문가(아니, 기술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임 방송통신위원장께서 청문회를 통해 당당히 스핀닥터를 자임하셨으니 그의 친구들이 득세하는 건 당연하겠죠. KBS와 MBC에서는 몇몇 분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찜’하고 계십니다.


옆으로 빠질 듯 빠질 듯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다 갑자기 중앙으로 방향을 틀어 10개 핀을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마법의 스핀(볼링).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반작용을 뒤틀어 기어이 쓰리 쿠션의 길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의지의 스핀(당구). 자! 스핀닥터와 그의 친구들이 스핀 실력을 발휘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겁니다. 스핀 잘 못 걸리면 볼링공은 도랑에 빠지고 ‘삑사리’ 나면 당구공은 튀어 오릅니다. 더구나 볼링공과 당구공은 보통 단단한 게 아닙니다. 잘못하면 당구공이 날아올라 이마를 때릴 수 있습니다. 볼링공이 발등에 떨어지면 발등 깨집니다. 그때는 진짜 닥터가 필요할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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