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 훈센, 봉봉… 아시아에 '민주주의 모델'은 없나

[구정은의 세계를 보는 눈] (4) 지역·역사 따라 다르게 전개된 민주주의

합법적인 선거로 선출된 탁신 친나왓 정권이 2006년 축출된 이래로 태국 정치권은 탁신계와 반탁신 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벌였지요. 성공한 기업가 출신이지만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탁신은 왕실에도, 군부에도, 기득권 정치엘리트들에게도 눈엣가시였습니다. 군부는 그가 유엔 총회에 간 사이 무혈 쿠데타로 몰아냈죠.


그러나 2008년 선거에서 탁신계가 다시 승리했습니다. 군부와 반탁신계는 탁신을 부패죄로 기소했고, 탁신은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탁신을 지지하는 시위로 방콕이 마비되자 군부가 무력 진압에 나서 9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했는데도 2011년 선거에서 또 탁신계가 승리했고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총리가 됐어요. 2014년 헌법재판소는 직권남용으로 몰아 잉락을 쫓아냈고 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했습니다. 탁신계를 몰아내고, 선거를 하면 국민들은 다시 탁신계를 지지하고, 군부가 다시 탁신계를 몰아내는 일이 되풀이된 것이죠.

15년간 해외 도피 생활 끝에 귀국한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지난 22일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AP뉴시스


◇탁신 전 총리 15년 만에 귀국
계엄통치와 공포정치를 거쳐 태국 정치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올 5월 총선 뒤 복잡한 협상을 거쳐 탁신계 정당 프아타이가 집권을 했습니다. 이 정당에 소속된 세타 타위신이 의회 표결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총리가 됐습니다. 그러더니 탁신이 귀국을 했네요. 국외 망명 15년 만입니다.


그런데 군부 정치가 끝나고 탁신계가 ‘제자리’를 찾았다고 보기엔 영 껄끄럽습니다. 총선에서 1당이 된 것은 권위주의 정권에 악용돼온 왕실모독법의 개정을 비롯해 사회개혁을 약속한 전진당이었는데, 탁신계가 전진당을 쏙 빼놓고서 오히려 군부와 손잡고 집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국의 한 정치분석가는 프아타이와 군부의 결탁을 ‘파우스트적 거래’라고 평했더군요. 한때 군부의 숙적이었던 탁신 진영이 군부의 그간 행태에 면죄부를 주고, 스스로 존재 이유를 없앤 꼴입니다.


그 대가가 탁신의 귀국과 사면일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기업가 출신으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 세타 총리보다는 탁신의 막내딸 패통탄이 당의 실세라고들 분석하더군요.


탁신은 22일 귀국하자마자 잠시 수감되는 절차를 거친 뒤 경찰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고혈압에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지만 그를 미워하는 ‘반탁신운동가’들은 꾀병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라며 병원 앞에서 시위하고 있답니다.


병원 앞에서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에 프아타이와 군부는 개혁세력 전진당을 무력화할 궁리를 하는 모양입니다. 왕실모독법을 개정하자는 것이 ‘정부 전복 음모’에 해당되는지 헌법재판소가 검토 중인데, 자칫 전진당이 해산될 우려도 있습니다. 2020년 시민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랏사돈’이라는 개혁정당이 만들어졌는데, 이들이 성장할 기미가 보이자마자 바로 해체한 전례가 있거든요. 갈등과 대립 속에 20여년을 보냈으니 이제 무엇보다 안정이 중요하다면서 탁신계와 군부의 흥정을 편드는 목소리도 없지 않지만, 시민들이 지지한 정당을 따돌리고 개혁을 무산시키는 것을 ‘민주주의 복원’이라 불러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 신임 총리 훈 마넷이 취임 첫날 집무실에 앉아 있다. /HMN


◇훈 센 아들 훈 마넷 캄보디아 신임 총리에
이웃한 캄보디아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장기집권을 했던 훈센 총리의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았습니다. “더욱더 많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새 총리를 축하했다.” 크메르타임스의 26일 기사 제목입니다. 인도의 나렌드라 총리를 비롯해 방글라데시, 벨라루스, 브루나이, 중국, 쿠바, 남한과 북한, 가나, 일본, 미얀마, 싱가포르, 베트남 등등의 국가지도자들이 신임 총리 훈 마넷에게 축하를 보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힘겹게 쌓아가고 있는 동티모르의 주제 하무스-오르타 대통령도 축하 메시지를 전한 지도자들 명단에 올랐습니다.


훈센, 오래도 집권했지요. 폴 포트 시절 암흑의 역사로부터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인물이지만 1998년에 정권을 잡았으니 25년간 권좌에 있었네요. 20대 시절 베트남 ‘괴뢰 정부’의 총리를 지낸 것까지 치면 더 길고요. 일전에 만났던 캄보디아인은 “훈센 정부가 가장 잘한 일은 학교를 전국에 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기집권 훈센 정부의 부패를 다들 알지만, 이미 집권한 지 오래돼 ‘먹을 만큼 먹었다’, 그런데 집권자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해 먹으려 할 터이니 부패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를 내세우더군요. 훈센 정부가 반민주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훈센 뒤에 있는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화살을 돌렸습니다.


어찌됐든 훈센 정부에 대과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고, 그 덕에 아들이 현재로선 ‘별탈없이’ 권력을 물려받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겠지요. 유엔개발계획(UNDP)은 ‘최저개발국 리스트’라는 것을 만들어서 국가별 발전전략을 지원해줍니다. 캄보디아는 그 목록에서 2027년 ‘졸업’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훈 마넷 총리는 24일 야심찬 ‘오각형 성장전략’을 발표했습니다. 2030년에는 중상위소득 국가, 2050년에는 고소득 국가가 되겠다는 비전을 담았습니다. 최저개발국 리스트 졸업을 준비하며 발판을 닦았으니 이제 성장할 때가 됐다는 겁니다. 프놈펜포스트 등이 ‘2050년 비전’이라며 소개한 내용을 보면, 베트남의 발전노선을 충실히 따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훈센은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왔으며 아들의 정권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반베트남 정서가 높다지만, 발전하려면 베트남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많다더군요.

필리핀 새 대통령 봉봉 마르코스(사진 왼쪽)와 그 아버지. /봉봉 마르코스 페이스북


◇필리핀, 봉봉 집권 후 껄끄럽던 미국과 밀착
작년 5월에는 필리핀에서 옛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대통령의 딸이 선거에서 승리해 나란히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됐지요. 이미 두테르테 시절에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고 국민 저항에 밀려 쫓겨났던 마르코스의 시신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더니, 그 아들은 한술 더 뜹니다. 현지언론 인콰이어러에 따르면 지난 24일 봉봉 마르코스 대통령이 정치 기반인 일리코스 노르테 지역에서 자기 아버지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답니다. 마르코스 정권을 밀어주던 미국은 이 독재자가 자국민들에게 축출되자 하와이 망명을 받아줬는데, 이제 그 아들이 집권해 남중국해에서 ‘반중국 전선’에 적극 가담할 태세를 보이자 몹시 반가워하는 듯합니다.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매트에서 한 분석가는 몇 년 새 껄끄러웠던 미국과 필리핀 관계가 봉봉 집권 뒤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해상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을 경계하는 필리핀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동안만의 이야기이겠지만요.


한국의 1987년 시민항쟁에도 영감을 준 피플파워 혁명, 어릴 적 제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국제뉴스’가 바로 그 시절의 필리핀 뉴스였습니다. 하늘로 치켜올린 코라손 아키노의 손이 V자를 그리고 있던 장면 말입니다. 하지만 모두 흘러간 역사인 걸까요. 얼마 전 여행길에 만난 필리핀 관광객은 두테르테의 정치적 기반인 민다나오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두테르테를 지지해왔다면서 “인권문제 같은 것은 없다, 언론에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더군요.


미얀마에서는 얼마 전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힙합 가수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21년 쿠데타 이후 군부에 저항한 시민 4000명가량이 살해됐고 2만4000여명이 수감됐습니다. 권위주의로 치닫는 중국이나 북쪽의 왕국에 대해선 말하기도 지겹습니다.

구정은 국제전문 저널리스트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일본은 어쩌다 한번 주목받을 때면 ‘논란’이 따라붙습니다. 코로나19 초반에 보여준 무능력,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 감각을 보여준 도쿄올림픽,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독재자 딸’의 집권을 거쳐 ‘촛불혁명’을 지난 뒤 오히려 구시대적 냉전질서로의 회귀에 박수를 치고 있는 한국은 또 어떤가요. 차라리 아시아 호랑이들의 경제발전 모델을 놓고 ‘아시아적 민주주의’에 관해 대담한 토론을 벌였던 리콴유와 DJ의 지상 논쟁이 더 수준 높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제발전의 모델이 됐던 일본과 그 뒤를 따라 ‘다이내믹 코리아’를 선보였던 한국,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델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가치이면서도, 한 지역과 공동체의 역사적 궤적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기에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모델’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물음부터 다시 던지게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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