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연도 흘려듣지 않았다' 그 기자들의 특종 취재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와 1년 동행한 부산일보, 택시기사 하소연에 주목한 KBS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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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취재해서 기사 쓰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이지만, 기실 기자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듣는’ 것에 있다. 출입처에서, 단톡방에서, 취재원이나 제보자로부터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를 듣고 그중에 ‘얘기될만한’ 걸 선별해서 기사를 쓴다. 바꿔 말하면 무심히 흘려넘기는 정보나 이야기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여기, 잘 ‘들은’ 기자들이 있다. 누군가의 하소연을 흘려듣지 않고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임을 포착해 보도함으로써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도 받았다. 지난 5월과 6월 각각 기자상을 수상한 부산일보 <제3자가 된 피해자-‘부산 돌려차기’ 등>과 KBS <성 착취물·지인 연락처 담보로…‘불법 추심’의 덫>을 취재한 기자들 얘기다.


지난해 5월, 변은샘 부산일보 기자는 부산 서면에서 귀가 중이던 여성이 뒤따라온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당한 사건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나중에 ‘부산 돌려차기’란 이름으로 알려진 그 사건이었다. 보도 후 변 기자에게 메일이 왔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라며,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다고 했다. 변 기자는 별 의심도 없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자세히 설명할 테니 연락 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변은샘 기자를 비롯한 부산일보 기자들은 강력범죄 피해자가 정작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상세히 알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피해자와 1년 가까이 동행하며 기획보도와 연속보도를 해왔다. 사진은 지난 5월3일 부산일보 2면 기사.

이후 통화에서 피해자는 기사에 나온 가해자의 범행 이유 등 ‘나도 모르는 걸 기자가 어떻게 들었냐’고 따지듯 물었다. 알고 보니 피해자는 폭행의 충격으로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고, 경찰로부터 상세한 설명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피해자인 당사자가 제일 잘 아는 줄 알았”던 변 기자는 오히려 놀라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공유했다. 그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사회부 기자로서 매일 사건기사를 쓰면서 “피해자 동의를 전혀 받지 않은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이후 부산일보는 피해자와 동행하며 경찰 수사부터 1심 선고까지의 전 과정을 면밀히 취재했다. 피해자가 사건 관련 증거들을 모으기 위해 민사소송까지 하며 분투했던 시간을 지켜봤고, 범죄 사건에서 ‘제3자’로 밀려난 피해자들의 ‘알 권리’에 주목해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을 연결하고 대안을 찾는 일도 함께했다. 변 기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와 같이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또 “많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부끄러운 게 제가 매일 쓰는 건 가해자가 무얼 했는가에 집중하는 기사잖아요. 반론을 들을 때도 왜 했는지 가해자에게 묻고 모든 시선이 가해자 중심으로 갔는데, 정작 기사를 쓰는 것도 피해 사실 때문인데 비중을 적게 두고 있었던 거죠. 가까이서 피해자의 고군분투를 보고 나니 앞으로 피해자가 있는 어떤 사건을 봐도 어떤 피해를 입었고 (피해자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사건기사가 대개 가해자 중심으로 쓰이는 건 경찰 등의 피해자 보호 원칙, 기사 작성의 편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 기자는 누구보다 ‘피해 호소’를 많이 듣는 직업인이기도 하다. 세상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많고, 그런 사연을 경찰이나 법원이 아닌 언론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큼 ‘센’ 사연이 아니면 반응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KBS 사건팀 기자들이 지난 2월21일 첫 보도를 시작으로 성 착취 추심 실태를 연속 보도했다. KBS 뉴스9 화면 갈무리.

KBS ‘성 착취 추심’ 보도의 시작은 그런 면에서 이례적이다. 올 초, KBS 사건팀 기자들의 단톡방에 당시 ‘마와리’(경찰서를 돌며 취재하는 일을 가리키는 은어)를 돌던 수습기자가 택시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보고했다. 딸이 불법 사채를 써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는 하소연이었다. 택시를 타면 으레 듣게 되는 신세 한탄이겠거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만원’ 소액 대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건팀장(캡)과 부팀장(바이스)은 “추심과 성 착취 범죄가 결합된, 처음 보는 유형”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 딸을 만났고, 유사한 피해 사례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지난 2월부터 ‘불법 추심’과 ‘N번 방’이 결합한 신종 범죄 실태를 최초로 고발했다. 보도 이후 경찰 수사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지난 6월 총책이 검거됐다.

택시기사의 하소연을 흘려듣지 않고 연락처까지 받아 보고한 수습기자의 성실함, 예사로운 사건이 아님을 알아챈 데스크의 판단력, 비슷한 사례를 찾고 범행 수법을 파악해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 일선 기자들의 취재력 등이 결합해 ‘팀플레이’로 빛을 발한 사례다.

당시 취재에 참여한 입사 3년차 현예슬 기자는 기자상을 받은 뒤 취재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취재하며 ‘더 큰 사건 없나, 더 센 것 없나’에 빠져 있던 건 아닌가. 작지만 중요한 이야길 놓친 건 없었는지 돌아봤습니다. ‘방법이 없겠냐’는 택시기사의 고민을 기자 4명이 물고 늘어졌듯, 작은 이야기도 귀담아 듣겠습니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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