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 호우·산사태… 그래도 간다, 사명감으로
['장마 재난'… 기자들 고군분투 현장]
곳곳에 물·흙더미… 두려움 느껴
방송기자들 12시간씩 서서 중계
신문기자도 휴일없이 2주째 근무
엄청난 위력의 태풍이 휩쓸고 간 것도 아니었다. 여느 여름 때처럼 장마가 시작됐고 장맛비가 내렸을 뿐인데, 그 비가 ‘물폭탄’이 되어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집이 무너지고 논·밭 등이 흙과 물에 잠기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란 점이다.
몇 해째 여름마다 기상이변 수준의 물난리를 겪으며 사전학습을 한 언론들은 전국적으로 강한 비가 예고된 지난 14일을 전후해 특보체제 등을 갖추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실제 발생한 비 피해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다년간 집중호우 상황을 취재해온 기자들조차 “이런 비는 처음”이라고 했고, 두려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사명감으로 현장을 지키며 피해 상황을 알리기 위해, 더 큰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난 15일 아침, YTN 경북의 김근우 기자는 산사태 소식을 듣고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로 향했다. 이 마을엔 벌방1길과 2길 두 개의 길이 나 있는데, 도착해서 보니 그 벌방2길이 “강처럼 변해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 서서 중계를 하는데 실시간으로 물이 차오르면서 발이 빠졌다. ‘큰일 났다’ 싶어 자리를 떴다. 하지만 곳곳이 물, 아니면 흙더미였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흙을 밟고 서도 발이 계속 빠졌다. 그런 상황에도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이런 산사태 현장을 처음 봤다”는 김 기자는 “제일 무서웠던 건 언제 또 산이 무너져 내려 우리 앞까지 닥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곳 벌방리에서만 산사태로 주민 2명이 매몰됐다.
김선형 연합뉴스 대구경북취재본부 기자는 지난 17일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사건팀 캡인 김 기자는 소방상황실이 있는 예천스타디움에 남고 후배 기자 4명이 수해 현장에 취재를 간 참이었다. 오후 3시경 재난경보가 울리더니 돌풍과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순간 상황실도 아수라장이 됐는데, 비구름대가 후배들이 가 있는 현장으로 옮겨가는 게 눈에 보였다. 황급히 단톡방에 ‘기자들을 철수시키겠다’고 올렸지만 아무도 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기자들도 대피하느라 답을 하지 못한 거였는데, 철렁했던 순간이었다. 김 기자는 “마침 전날 산사태 현장에 갔다가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걸 본 터라 더 아찔했다”면서 “제가 이스라엘 특파원도 하고 가자지구도 갔다 왔는데 위험도는 거기 포탄 떨어지는 것보다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수해 현장이니 열악한 것은 당연하고 돌발 상황도, 변수도 많아 항상 긴장 상태다. 앞으로도 많은 비가 예고돼 있어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이틀째 모텔 신세를 진 김근우 기자는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대기한다”고 했다. 역시 비 피해가 큰 충청권의 송국회 KBS청주 기자는 지난 14일 새벽부터 특보 중계를 시작했다. 송 기자 포함 사건팀 기자 4명이 “24시간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 번 중계를 타면 거의 12시간을 서 있기도 한다. 비를 맞으며 스마트폰에 쓴 원고를 보기도 쉽지 않아 최대한 외워서 진행하는 편인데, 열악한 상황에서도 지역 시청자들에게 정확한 대피 정보와 추가로 예상되는 피해를 알리기 위해 애쓴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지만 “재난 상황이라 감수하고 있다”고 송 기자는 말했다. 그는 “사명감이 있다”며 “자칫 실수하거나 오보하거나 지연 보도하거나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충청지역 일간지인 중도일보의 임병안 기자도 휴일 없이 2주째 일하고 있다. 중도일보는 지난 17일자 신문에서 전체 20개 지면 중 10개 면에 폭우 기사와 사설을 쓰기도 했다. 14명의 사망자를 낸 오송 지하차도 침수 사고가 인재(人災)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으니, 지금의 비가 멈춘다 해도 피해 복구와 방재 대책 점검 등까지 앞으로 할 일은 더 많을 것이다. 임 기자는 “힘들긴 하다”면서도 “재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그런 말 못 한다. 어떻게 보면 안전한 곳에서 작업하는 거니까”라고 했다. 김근우 YTN 기자도 “생업도, 집도 잃은 분들 앞에서 힘들어도 힘들다는 티를 못 내겠다”며 “좁아터진 마을회관에서 30~40명씩 모여 주무시는데, 그분들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김선형 기자는 기자들이 “몸을 바쳐서 일하고 있”는 게 오히려 걱정이다. 그래서 ‘가지 마라’, ‘바위 떨어질지 모른다’고 만류하곤 한다. 김 기자는 “현장의 모든 기자들이 다들 불나방처럼 물에 뛰어들지 않나. 부디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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