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와 지하철 앞에 선 장애인의 정치

[언론 다시보기]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

비영리 독립언론을 규정하는 가장 큰 부분은 정부와 자본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이다. 언론이 정부와 자본이 물린 돈의 재갈로 인해 제대로 된 권력 감시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독립언론의 필요충분조건인가.


독립언론에는 하나의 역할이 더 요청된다. 이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져 온 이슈에 대한 감각을 전복하는 것이다. ‘해일이 밀려오는 데 조개만 줍고 있냐’는 말이 있다. 대의론을 역설하는 말인데, 해일을 경험한 조개의 이야기는 왜 중요하지 않은가.


주류언론에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다. 한국언론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엘리트주의다. 언론사엔 직업 특성으로 인해 높은 학벌을 가진 이들이 많다. 이들은 기자가 되기 위해 그 전부터 주류언론 1면을 차지하는 이슈에 대한 지식과 언어, 관점을 습득해야 한다. 주류언론사 기자가 된 후엔 조직 내에서 비슷한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향유하며, 사회적으로는 중간계급이 된다. 그러한 시각은 기사에 오롯이 묻어난다. 지금 언론의 모습이다.


‘악’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기자는 대중의 시선을 쫓아 현장에 달려간다. 사람들의 관심은 조회수로 반영되고 조회수는 수익(광고)으로 직결된다. 시의성의 틈바구니에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의 삶 또한 ‘시의성이 있을 때만’ 다뤄진다. 시의성 있는 기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주류언론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문제를 더는 문제라고 여기기 어려울 만큼 항상성을 유지한 고착된 일상이다. 끊어낼 수 없는 지리멸렬한 일상은 ‘사건’으로 드러나기 전엔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낮은 기초생활수급비로 깎여나간 일상, 부족한 활동지원시간에 전전긍긍하는 일상, 학교에 갈 수 없고 노동할 수 없어 집에 처박혀 사는 박탈된 일상. 이러한 일상은 제도에 의해 직조된다. 장애·빈곤 이슈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제도가 너무 어렵다”는 것인데, 장애·빈곤 제도가 이토록 복잡한 이유는 이제까지 언론에 의해 제대로 감시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도는 매번 예산에 맞춰 누더기처럼 꿰매졌다. 그러니 정치는 여의도 국회에만 있지 않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의 삶은 이 얼마나 정치적인가.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후 장애인의 삶은 난도질당하고 있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에서 권익옹호 직무는 삭제되고, 서울시 활동지원시간을 받던 장애인 389명은 서비스시간 중단·삭감 통보를 받았다. 소수자의 삶과 죽음이 ‘기사 아이템’으로 발제되고 소비되는 사이, 장애인은 시나브로 죽어 나갔다. 상복을 입고 싸웠던 시간을 건너 다시 버스와 지하철 앞에 선 이들의 싸움을 제대로 읽어내어 기사로 쓸 수 있는 기자가 주류언론에 몇이나 있는가.


부디 기자들이 지하철과 버스를 가로막는 현상 넘어 구조적 문제를, 삶의 행간을 읽어내 주길 바란다. 제도의 변화가 당사자의 삶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질문해 주길 바란다. 삶을 걸고 싸우는 이들의 행위가 고작 ‘교통방해’쯤으로 읽히게끔 하는 것은 기자로서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이는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극복이 아닌, 직업적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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